사도행전 묵상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 - 사도행전 9장 1-9절

차작가 2023. 12. 12. 11:47

성경:

1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절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절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절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절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절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 하고 섰더라

8절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절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나니

본문 해석:

<세상에서 사람을 찾아 오는 것은 조건 때문이다. 이익 때문이다>

삼고초려: 삼국 시대촉한유비가 융중에 기거하던 제갈량을 얻기 위해 몸소 제갈량의 초가집으로 세 번이나 찾아갔던 일화를 일컫는다. 삼고 지례, 초려삼고(草廬三顧)라고도 한다. 그래서 삼고초려는 꼭 필요한 인재를 얻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모든 예를 극진하게 갖춰 모시는 걸 지칭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빵고초려: 2008년 여름 프로 축구 수원 삼성의 스카우트 조재민 씨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한 빵집을 하루가 멀다고 드나들었다. 그곳에 가면 중동중에 재학 중이던 축구 선수 권창훈이 빵집 주인인 아버지 권상연 씨의 일을 돕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권창훈을 매탄고에 데려가기 위해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던 조 씨가 빈손으로 빵집을 오기가 미안해 구입한 소시지 빵만 수백 개였다. 아버지 권상연 씨는 처음엔 신설팀인 매탄고에 아들을 보내는 걸 꺼려 조 씨를 차갑게 대했지만, 나중엔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권창훈은 수원 삼성의 유스 팀인 매탄고로 진학했고, '왼발의 달인'이라 불린 고종수 수원 코치를 만나 기량이 급성장했다. 이를 놓고 네티즌들은 '삼고초려'가 아닌 '빵고초려'로 부른다. 지극 정성을 들여 한국 축구는 미래를 짊어질 든든한 자원을 얻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은 그런 조건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사울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사울은 하나님의 원수 중의 원수이다. 사울 같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훼방꾼이 없고, 사울 같은 철저히 무장된 박해자가 없었다.

하나님을 믿을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은 없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사도 바울은 절대로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울은 예수님을 증거했던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주동자이다. 그리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부지런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울을 찾아 오셨다.

생각이 틀렸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 찾아오셨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분이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려고 했고, 이것은 사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이 사울에게 직접 나타나셨다. 결국 그것은 사울의 생각이 틀렸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고치시고 자기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 오신 경우

아브라함과 모세를 찾아오셨다.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변방에서 우상이나 만들다 죽었을 것이다.

모세는 아마도 미디안 땅에서 양치기로 끝났을 것이다.

하나님이 찾으실 때 그 어떤 조건도 묻지 않고 우리 행함에 대해 꾸짖지도 않으심

사울은 예수의 도를 좇는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붙들어 오려고 가던 중이었다. 사울은 예수님의 도, 즉 복음 자체를 거부하고 싫어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때까지 사울이 이해하는 복음은 율법을 행하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 자체였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 그리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얻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고 성전이 없는 이방인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만약 이방인에게까지 구원의 빛이 비췬다면 결국 유대인들의 자존심인 율법의 의미와 성전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방인이라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 아래 들어와야 하고 성전의 제사에 참여해야 마땅한데 그런 것 없이 구원의 빛이 비췬다는 것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믿고 있던 믿음의 근거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도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스데반의 설교에 대한 반응으로 명확해졌다. 스데반의 설교는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 모두가 하나님의 지으신 하나님의 집이기에 하나님은 어디든 계시는 것이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공간에 갇혀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 스데반의 설교였다. 그리고 할례를 받은 유대인을 향해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로 지칭했다(7:51). 이것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분노하게 했다.

스데반의 설교는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자부하는 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는다'라는 고발이었다. 즉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 스데반의 설교였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이 전하신 도였고 복음이었다. 사울은 바로 그 도를 싫어하고 배척했다. 그래서 예수의 도를 좇는 자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붙잡았던 것이고, 예수님을 그것을 두고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스데반을 죽인 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를 핍박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를 못 나가게 하고, 교회에 와서 훼방을 하는 차원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함과 의 자체를 용납하지 않고 자신의 행함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된다는 답을 내릴 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하는 길로만 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유대인들이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나, 현대 교인들이 예배당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것이 곧 복이 된다고 여기는 것이나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복을 얻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보는 현대 교인의 사고방식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곧 예수님의 도와 배치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도 사울과 같은 사람들>

우리는 사울과 같은 사람들이다. 완악하고 목이 곧고 자기 고집으로 살아가며 나이 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가 바로 우리들이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한 번에 영접한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한번 도 거부하지 않고 한 번에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은 없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많이 거부했는가? 모태 신앙도 다르지 않다. 반드시 갈등을 겪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원래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하늘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나, 오늘 우리가 성경 말씀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나 결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울의 체험을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그러한 체험을 이유로 해서 사도 바울과 우리 자신을 차별할 이유도 없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대단함>

사울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붙드시지 않으면 안될 완악한 자였다. 그를 부르시고 붙드시고 고치신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증거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 나를 교회 다니게 하신 것이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 밖에 안되었던 본래의 내 상식을 버리게 하시고 내 생각을 고치셔서 예수님의 도를 좇게 하신 그 능력이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또한, 복음에 훼방꾼이었고 철저히 무장된 박해자인 사울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사울을 불러 아주 소중한 위치에 심어 쓰셨는데 ‘롬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오늘 이 사건에 대해 “은혜의 경륜”이라고 표현함>

엡3: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경륜’은 일반적인 의미로는 천하를 통치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고, 신학적인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뜻과 계획을 이루심에 있어서 인간을 위한 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은혜의 경륜’은 이 땅에서 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개입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의 역사는 성경 전체에 살아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인생 여정에 개입되어 있고 하나님의 뜻으로 다스리며 그 뜻이 이뤄지는 방향으로 인도해 가심을 계시한다.

<하나님이 찾아 오신 그 결과>

회개에 이르게 된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의미: (구하다, 여호와께 구하다-유대식 이름)

바울이라는 이름의 의미:(작은 사람, 작은 존재자로 로마식 또는 헬라식 이름)

예수 만나기 전엔 누구보다도 여호와 앞에 구하며 열심히 특심인 인생을 산다고 자처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주님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