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해석:
본문에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마술을 하는 사람이었다.
8: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8: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8:11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라는 말을 보면 시몬이 행한 마술은 지금과 같은 손놀림이나 눈속임의 차원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시몬 앞에 빌립이 등장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하며 세례를 줬다. 시몬도 세례를 받고 빌립을 따라다니면서 빌립으로 인해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으로 인해서 놀라게 된다. 이것을 보면 빌립이 행한 능력이 마술사인 시몬이 행한 것보다 더 대단한 것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에 있던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와서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하자 성령을 받는 역사가 일어난다.
이러한 모든 광경을 목격한 마술사 시몬이 사도에게 돈을 주면서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19절)라고 요청을 한다. 시몬은 사도들이 행하는 능력을 돈을 주고서 살려고 했다. 이러한 시몬에게 베드로는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20-21절)고 말한다.
이것을 보면 시몬이 빌립에게 세례를 받고 그를 전심으로 따랐지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시몬은 빌립이나 사도들이 행하는 능력과 표적들이 자신의 능력보다 더 커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는 빌립이 행하는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단지 그 능력만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능력에 놀랄 뿐이지 사도들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몬은 사도들에게서 돈을 주고서라도 그 능력을 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성령인데 그럼 누가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은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이것을 요한복음 3장에서는 거듭남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문은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인의 관원 중 한 사람인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 내용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라고 말한다. 니고데모가 유대인의 관원이라면 니고데모는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높은 유대 의회의 회원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우리가 ~ 안다'라는 말을 한다. '내가'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볼 때 니고데모 개인이 아니라 다른 바리새인들도 예수가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임을 인정한다고 볼 수도 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으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 때문이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목격을 했거나 소문으로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이적을 베풀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 대한 니고데모의 시각이다.
이렇게 볼 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단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표적으로 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니고데모에게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초자연적인 이적을 일으키는 선생일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보게 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다만 '행하신 표적을 보니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이라는 말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니고데모의 말에 대해서 5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에 대한 니고데모의 시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되는 것이지 인간의 의지나 순종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한다. 즉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인간의 자연적 과정을 통해서 탄생되는 것이 아닌 영에 의한 창조를 뜻한다. 그러므로 거듭남, 즉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에 위로부터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되고 위로부터 되는 것이라면 거듭 강조하지만 인간의 의지나 노력은 절대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니고데모는 다만 행한 일을 보고 판단하는 수준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육의 시각이다. 이러한 니고데모는 곧 율법의 수준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율법의 수준이란 행한 일을 통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은 행위로 판단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오직 영으로만 됨을 말씀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으로 산다는 것은 행위를 높이고 행위를 가지고 믿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으로 됨을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니고데모는 인간의 행함을 버리지 못한 수준의 사람이었다. 인간의 행함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은 행함을 가졌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을 인간이 천국에 가게 되고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한 요건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지금의 인간으로는 도저히 천국에 해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위대한 행함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천국에 갈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해서 천국에 보내시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거룩한 행위를 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고 인간의 자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거듭남을 인간의 기질이 달라지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성격도 달라지고 믿음도 있고 열심과 봉사와 충성이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행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니고데모의 수준인 것이다.
이처럼 육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것도 육의 차원에서 이해를 하려고 한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4절)라는 반문을 하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거듭남에 대해서 부정하는 말에 더 가깝다.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나 위로부터라는 말에 대해서는 무시해버리고 순전히 육적인 시각에서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다 자라서 늙기까지 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느냐는 말을 하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니고데모야말로 참된 진리를 볼 수 없는 소경 된 자였다.
이것은 니고데모만이 아니라 율법을 단지 행함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모든 사람의 시각이다. 특히 자신이 노력과 의지로 열심히 봉사하고 많은 종교적인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그것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백성이며 율법을 받은 자이고 또 열심히 율법을 행하고 지키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미 천국이 자기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들이 거듭나야만 천국 간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육의 시각만을 보여주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새로운 탄생은 물과 성령으로 된다. 그런데 왜 물이 개입되는 것일까? 사람이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면 오직 성령으로만 된다는 뜻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물을 성령과 함께 말씀하심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물을 물세례로 이해를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목사가 교회에서 행하는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절대적으로 반대되는 이해임을 알아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행함으로 되지 않음을 말씀하면서 물세례라는 인간의 행함을 언급하신다는 것은 크나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목사가 행하는 물세례는 결코 성도가 천국을 가는데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에 대해서도 같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직접 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천국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렇다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것은 물과 성령을 따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의미에서 말씀하는 것이다. 즉 물로 난다는 것이나 성령으로 난다는 것을 같은 차원에서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례요한이 베풀었던 물세례를 다시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세례는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서 베풀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물세례를 베풀면서도 물세례 자체를 강조하고 의미 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 세례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1:33절에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보면 요한의 물세례는 요한이 독자적으로 만든 의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분이 따로 존재한다. 그분이 요한에게 말하기를 성령이 내려서 머무는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요한은 이미 성령으로 세례 주는 분이 있음을 아는 가운데 물세례를 줬다. 그러므로 요한의 물세례는 성령세례를 의식한 것이었고 그런 이유로 물세례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세례를 강조했던 것이다. 결국 물세례의 실상은 성령세례이며 그런 뜻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요한의 물세례는 죄인 된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물속에 잠겼다가 나온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 물세례인 것처럼 성령세례는 죄인 된 우리를 위로부터 다시 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물세례는 성령세례가 이렇게 주어진다는 것을 증거한다.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새로운 창조를 입은 성도는 육이 아니라 영을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거듭남과 거듭나지 못함은 성령에 의해서 인도됨과 육신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으로 구분된다.
성도는 성령에 의해서 거듭남으로 된다. 이것은 인간의 활동이나 의지로 되지 않는다. 성령만으로 가능하다.
6-8절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바람은 임의로 분다. 이처럼 성령도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에 의해서 믿음과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다. 또한 바람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지나갈 때 다만 그 흔적이 보일 뿐이다. 성령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령이 임하는 것을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성령이 임하신 그 흔적만 느껴지고 보일 뿐이다. 성령은 인간의 뜻과 원함에 의해서 활동하지 않는다.
믿음을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만들어 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믿음은 '자기 소리'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물로 위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은 '자기 소리'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소리를 내게 된다. 이것이 성령에 다스림 받고 있는 흔적이다.
성령의 흔적은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성도들의 행함과 고백으로 증거 된다. 즉 같은 행함이 있다 할지라도 육으로 태어난 자는 자기 소리, 즉 자신을 자랑하고 높이는 소리를 내지만 성령으로 난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높이는 소리를 내게 된다. 성령이 활동하기에 성령에 의해서 영의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것에 성령에 인도받는 삶이다.
어떻게 임하시고 역사하시는 가에 대해서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일이지만 성령이 역사하고 계심은 우리의 삶에서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증거 된다.
그럼, 우리가 성령 받은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시몬은 세례는 받았지만 예수가 주라고 고백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시몬은 능력을 돈을 주고 사려고 했다. 사도들의 능력을 돈을 주고서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자신이 좀 더 사람들에게 높임 받고 싶어 했다.
이러한 시몬의 의도가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결론:
은혜는 결코 우리의 말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은혜를 알기에 열매가 있다. 은혜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내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라고 감사하게 된다. 때문에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자신을 높일 수 없음을 안다.
이렇게 볼 때 은혜를 말하되 은혜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 어려운 것은 신앙의 결과가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의 것으로 보상된다는 약속이 없다는 것이다.
때로는 우린 자신의 노력과 행위의 결과가 자신의 것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신앙에 대한 허무함을 느낄 수 있다.
거룩하게 사는 것도 좋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도 좋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도 다 좋지만 그렇게 살아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뭐냐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오직 하늘의 것뿐이다. 세상의 것으로 보상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채워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하늘의 것보다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세상의 것으로 보상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생명이니 구원이니 영생이니 하는 것보다는 '복받았다'라는 말에 더 마음이 끌리게 된다.
시몬이 사도들의 능력을 사려고 한 것은, 사도들이 행하는 능력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능력을 자신이 소유한다면 자신의 가치도 역시 향상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돈을 주고서라도 사도의 능력을 소유하고자 한 것이다.
사도는 이러한 시몬에게 21절에서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세례를 받고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녔다고 해도 도(복음 전하는 일)에는 관계가 없고 주어질 분깃도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이 된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전심으로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면, 도에는 관계가 없으며 분깃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속마음을 내어 놓고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교회에서 봉사를 했을 때 봉사한 것으로 인해서 오히려 회개하게 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 봉사함으로써 감추어졌던 자신의 속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의 신앙이 마술사 시몬의 길이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항상 자신을 살피면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두면서 은혜를 증거하며 사는지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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