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목적이 뚜렷하면 길이 보인다 - 사도행전 8장 1-8절

차작가 2023. 12. 10. 13:38

성경:

1절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절 경간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절 사울이 교회를 전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 하는 것을 좇더라

7절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8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본문 해석:

성공한 사람에겐 고민은 있어도 갈등이 없다는 말이 있다. 목적이 뚜렷하니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과정 중에 벌어지는 어려움을 능히 극복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 같이 신앙생활도 그렇다는 것을 오늘 본문이 말해 주고 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바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스데반 집사의 순교 후에 벌어진 일이다.

스데반의 죽음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죽는 것까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스데반이 증거하고 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였다. 스데반의 마음은 분명 죽고 사는 것과 상관없이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한다'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전파했을 것이다. 이러한 스데반의 마음을 안다면 스데반의 죽음을 높이는 것에 그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보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스데반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삶은 결코 편한 삶이 아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만을 믿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한다면 나를 더욱 더욱 높이 쓰시기 위해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진다. 그런데 어려운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당장 믿음에 대해 의혹을 가지게 된다. '내가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라는 의문에 휩싸이게 된다.

오늘 본문도 보면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해서 교회가 오히려 핍박을 받게 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핍박 가운데서도 강하게 일어서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는 구약의 이스라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했을 때 그들은 수시로 모세를 원망했다. 애굽에 의해서 지배를 받다가 해방되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해 가던 그들이었다. 즉 희망이 없는 해방이 아니라 희망이 있는 해방이었다. 따라서 약속의 땅으로 간다는 그 희망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홍해를 앞에 두고 뒤에 애굽 군대가 추격하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를 애굽에 그냥 두지 않고 왜 이끌어 내서 여기서 죽게 하느냐?'라고 모세를 원망했다. 마실 물이 없을 때에도 원망하고, 애굽에서 먹던 것을 생각하며 원망하기도 했다. 이것이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왜냐하면 목적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목적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어떤 목적인가? 바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핍박과 흩어짐을 이겨낼 수 있었다.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흩어져서도 전멸당하고 감옥에 가도 복음을 전하는 발길을 주목할 필요 있다.

핍박 가운데서도 숨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동기는 무엇일까?

=>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살펴 보자.

=> 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럼, 왜 성도는 핍박받는가?

요 15:18-19절을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이유를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도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택함을 입어 예수께 속한 자로 살아간다. 이것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이유이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께 속했다는 것을 왜 미워할까? 그것은 세상이 가는 길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나 사회에서 왕따가 발생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학교나 사회라는 집단의 보편적인 질서나 방향에 거슬릴 때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시키는 것처럼 성도는 결국 세상에서는 왕따를 받아야 할 길을 가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이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성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가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곧 세상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도는 이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즉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조차 세상과 다른 것이다. 세상은 세상의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만 성도는 자신이 예수께 속한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존귀한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속했다는 것은 자신이 참으로 존귀한 분에게 소속되었음을 의미하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된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세상은 이것을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혹시 “그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왜 나는 항상 이렇게 밖에 못 사는가?”라는 불만은 없나? 그렇다면 그것은 여전히 세상과 같은 방향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보다 뒤처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고 원망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열심히 예수를 믿었다고 해도 달라진 것은 없고 또한 예수를 믿은 것도 아니다. 여전히 세상에 속한 체 세상이 가는 길과 같은 길을 달려가고 있었을 뿐이다.

세상은 성도가 자신들과 같은 길을 가면 핍박하지 않는다. 대신에 조롱한다. 예수 믿어도 별 수 없고 우리보다 돈을 더 밝히면서 비겁하게 스스로 노력할 생각하지 않고 절대자의 힘을 빌리려 한다는 조롱의 말만 들을 뿐이다.

성도에게 예수님이 가장 존귀한 분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본 자가 성도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보았고 죽음을 보게 된다. 때문에 생명이 되는 예수님의 의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 속한 자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예수님을 존귀하다고 외칠 수가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의와 긍휼의 은혜만을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은 그들의 의를 인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키고자 힘을 썼고 도덕적 삶을 살고자 애를 썼던 그들의 공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단의 자식으로 책망하셨기 때문이다.

성도도 다르지 않다. 예수님의 의만을 바라보는 성도가 세상을 향해 외치고 증거할 것은 인간의 선행도 의도 보람 있는 삶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긍휼의 은혜이다. 이러한 외침을 세상은 싫어한다. 그러니 성도에게 핍박은 따라올 수밖에 없다.

사도바울은 이런 핍박을 어떻게 생각했나 면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현대 교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에 난감한 말씀이다. 대다수의 현대 교인들은 은혜를 자신의 ‘잘 됨’으로 연결하려 한다. 은혜를 곧 축복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은혜를 고난으로 연결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믿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게 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한다. 자기를 위한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다. 고난이란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경우에서든 자신의 유익과 생계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고난은 육체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고 가시관을 쓰는 육체적 아픔을 고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을 버리고 대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골로새서 1:24절에 보면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이 이제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육체를 통해서 보여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통을 우리도 똑같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사셨을 때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유익과 생계를 위한 선택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한 선택을 하셨던 것처럼 신자 역시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을 세우기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고난을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은혜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게 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믿게 된 신자로서 가장 신자다움은 어떤 경우와 상황에서든 오직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싸움이며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자는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를 따라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신자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한 적당한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자신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싸움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자신의 유익을 위해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온다.

먼저, 사도들이다.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도 사명 때문에 남아 있다. 목적이 뚜렷하니까 죽음도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엔 빌립 집사이다. 빌립이 핍박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파 했다. 빌립 집사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사마리아로 갔다. 목적과 사명이 뚜렷하니까 가능했다.

8: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빌립은 그리스도를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함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이 나타났다. 그 표적이 이적이든 무엇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빌립의 행함까지도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행함도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표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빌립의 삶 모두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8:7 많은 사람(사마리아 지역의)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복음에는 이런 능력이 있다

8:8 그 성(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있더라

핍박은 있었지만 결국에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결론:

목적이 뚜렷하면 길이 보인다.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인생의 목적이 오직 예수를 전하는 것으로 뚜렷했다. 핍박이라는 고민거리들이 있었지만 핍박 받으면 굳이 예수를 따라야 하는가라는 갈등은 없었다. 복음전도의 목적이 뚜렷하니까 핍박도 상관없고 흩어지는 것도 상관 없다. 불만이 나올 수 없다. 불평하고 머무를 수 없다. 이런 영광된 삶을 살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