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교회가 진정으로 힘써야 할 것 - 사도행전 6장 1-9절

차작가 2023. 12. 10. 13:27

성경:

1절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2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3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4절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5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절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8절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절 리버디노,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본문 해석: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고국을 떠나 돌아 온 사람들)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초대교회에 구제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들 과부가 구제에 빠진 것 때문에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했다. 구제는 주고받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쓸 것을 나누는 것이 구제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구제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일만 볼 뿐 일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세상에 천국을 보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즉 천국이 어떤 것인가를 교회가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가 천국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인격과 성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갈 때 자연히 보이게 되어 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천국을 증거하는 일보다는 교회의 일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구제를 한다거나, 선교를 하는 등의 일에 매달리고 있다. 물론 교회가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구제를 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시하는 것은 그러한 일들이 교회를 선전하고 교회를 전파하기 위한 일, 즉 교회를 위한 일이 되어버린다면 결국 그 일 자체가 교회의 자랑거리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모든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천국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교회는 교회가 하는 일들로 인해서 예수님보다는 자기들의 일을 더욱 높이고 자랑하게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가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모이는 것이 필요하다. 말씀을 떠나지 않고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스스로를 점검하고 모일 때 교회가 교회로 존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구제든 선교든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아닐 때 교회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구제를 하라고 하신 것은 구제라는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구제를 함으로써 천국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복음을 믿는 신자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구제라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제보다 전도가 우선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복음을 증거하는 것과 구제하는 것이 서로 별개의 일이라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구제든 무엇이든 그 목적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즉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빠진 구제는 단지 가난한 자의 쓸 것을 주고받은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

빌 4:18절에 보면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라는 말씀을 한다.

오전에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드렸지만 빌립보 교회가 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선물을 보낸 것은 구제이다.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이 서로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로부터 물질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보낸 선물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향기로운 제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구제란 단순히 물건을 주고받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란 가난하고 어려운 자에게 준 물질이 아니라 그 마음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이 빠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구제일 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세상의 구제와 교회의 구제가 같을 수가 없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점이 없었다. 단순히 물질을 주고받는 관계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들 과부가 구제에 빠졌다는 것을 원망을 했던 것이다. 즉 구제가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단지 자신들의 파벌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벗어나 있는 결과임을 말해준다.

사도들은 이 문제로 인해서 일곱 집사를 세우게 되었다. 사도들이 입곱 집사를 세우는 이유는 2-4절을 보면 알 수 있다.

6: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문제의 근본 원인을 알게 되었다. 교회가 가장 우선시 해야 할 것은 기도하는 것(4절)과 말씀의 사역이다.

사도들의 주된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었으므로 식탁 봉사나 금전 지출의 일로 인해 말씀 전파의 일이 소홀히 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이 구절을 보면 열두 사도가 일곱 집사를 세운 이유는 교회를 조직하기 위해서라거나 구제는 사도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구제의 일을 맡기기 위해서 집사를 세운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교회에 집사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집사를 교회라는 조직 안에서 하나의 직책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사실 거의 모두가 집사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교회를 몇 년 나오면 자동적으로 집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도가 집사를 세운 것은 교회의 조직이나 교회 일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즉 조직을 탄탄하게 해서 교회의 발전과 성장을 이루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다.

열두 사도는 구제하는 일은 일곱 집사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겠다고 말했다. 즉 열두 사도는 오직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무하기 위해서 집사를 세워 구제를 맡겼다.

이것을 보면 초대교회가 구제하는 일에 사도들이 개입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초대교회에 발생한 구제로 인한 분쟁 때문이었다.

사도들은 구제로 인해서 발생한 문제를 교회가 말씀을 기준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말씀을 떠난 구제였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파벌에 의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으로 봤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구제는 집사가 할 일,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사도가 할 일, 이런 식으로 일에 구분을 두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은 구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구제가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말씀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집사는 회중들이 뽑는 것이다. 사도는 하나님에 의해 지명 받은 것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란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다. 자기의 생각 보단 하나님의 생각에 지배 되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말씀 충만이다. 말씀을 많이 안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칭찬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온 무리가 기뻐했다는 것이다.

6: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사역에 집중하니까 부흥했다.

결론:

옳고 그름은 오로지 생명 되는 복음을 세우는가 훼손하는 가로 평가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게 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로 인해서 복음이 훼손되고 있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구제를 부지런히 한다고 해도 그 일로 인해서 복음이 훼손된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초대교회는 분명 우리가 착한 일로 생각하는 구제를 부지런히 했다. 그런데 결과는 분쟁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구제가 말씀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구제로써 복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받는 관계로만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있게 되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열심이, 그 일로 인해서 복음이 훼손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일을 많이 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생명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교회로 굳게 서기 위해서 날마다 말씀을 전해야 한다.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말씀 위에 굳게 서기를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