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12절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절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절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절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16절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본문 해석:
5: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였다는 것: 이유는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다.
2) 사도들의 손을 통했다는 것: 사도들의 손을 통해 성령께서 역사하셨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초대 교회의 믿는 자들과 사도들의 믿음이 얼마나 힘 있게 증거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사도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서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서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혹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랄 만큼 믿음의 능력들이 많이 증거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힘 있는 믿음의 능력과 지금의 시대를 비교해 보면 지금의 믿음은 그 능력을 상실해 버린 채 단지 교회 다니는 사람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오늘날 현대의 성도는 믿지 않는 자와 똑같이 현실에 민감하며 죽지 않기 위해서 지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연약한 모습만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무엇을 소망하고 살고 무엇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느냐에 있어서 믿지 않는 자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아무리 믿는 자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힘 있고 성공하기 위해서 세상의 삶의 방식과 지혜를 따라간다. 때문에 출세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줄을 잡아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뇌물을 바치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결국 믿는 자가 세상의 출세에 성공에 매달림으로 남들과 똑같이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믿음의 능력을 상실해 버린 이름만 성도인 모습이다.
성도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다른 세상을 소망하고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성도를 세상에 대해서는 나그네로 행인이다. 그런데 나그네가 나그네답게 살지 않고 행인이 행인답지 않다. 나그네라고 하면서 행인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진 채 그것이 무거워서 허덕대는 모습만 있다. 세상이 과연 그것을 보고 성도를 다른 세상을 소망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성도이면서도 증거물이 없는 성도, 이것이 성도에게는 참으로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성도로서의 당당함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무기력한 모습만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성도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성도에게서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 있어야 한다. 성공해야 하고 출세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다른 삶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세상 말고 우리를 기다리는 다른 세상이 있음을 증거할 수 있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야 한다. 이 표적과 기사가 초대교회에서는 재산을 팔아서 서로 나누고 그로 인해서 핍절한 자가 없게 된 것으로 드러났다. 성도가 세상이 원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복에 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능력이다.
물론 본문을 보면 '성도의 능력, 표적과 기사라는 것이 병을 고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오해를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병을 고치는 능력이 없다면 성도로서의 표적과 기사가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도가 병을 고치는 것은 사도들 개인적 능력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감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행하셨던 일이 그대로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으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능력 아래 존재함이 증거 되는 것이다.
병든 사람들이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라는 것은 베드로의 권세가 드러나는 것이라기보다는 베드로가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드러나는 것이다. 즉 베드로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증거물이 없다.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을 보면서 믿는 자가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마음을 두게 하는 표적과 기사가 사라진 것이 오늘날 믿는 자의 현실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불러서 세상과 다른 구별되게 하셨다. 인생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 자기 계획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인도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며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이 모든 근원이 되시는 인생으로 불러내셨다.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 살던 인생에서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사는 인생으로 불러내신 것이다.
이것이 성도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 된 우리가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지 않고 예전과 똑같이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다. 그리고 성도로서의 구별된 삶을 증거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과 같다.
성도에게 있어야 표적과 기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된 인생으로 불러내셨다. 그리고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성도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고 염려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다만 하나님을 힘으로 삼을 뿐이다. 믿는 자의 이러한 표적과 기사가 보일 수 있길 기도한다.
5: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신도들의 모임에 끼어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으며)
1) 보여줘야 할 것 두 번째가 끼어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나머지: 눈 앞에서 벌어지는 큰 역사를 보면서 감히 저항하거나 부인은 할 수 없지만 그렇다 해서 적극 적으로 믿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를 향해서 이런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에 대한 세 가지 부류의 반응들:
a) 복음을 적극적으로 영접하고 순종하며 온 생애를 주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속하기 바람)
b) 복음에 대해 호의적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순종하거나 헌신까지는 할 마음이 준비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c) 복음을 듣고 마음에서 튕기고, 적극적으로 부정하며 훼방하는 사람들이다.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교회가 일차적으로 감당해야 할 부류가 바로 두 번째 사람들이다. 호의적이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믿음에 따라 살려는 준비는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의 필요를 먼저 찾는 경우가 많다.
본문의 15절도 그런 사람들이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사실을 믿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우려고 거리로 나왔다. 하나님께 가면 내 필요를 채울 수 있다는 생각이 기복 신앙으로 생각은 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교회와 사람들과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필요에서부터 시작됨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민생활의 어려움, 언어 불편, 인종차별 등 모든 것이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에서부터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찾았다. 예수님의 사역도 거의 대부분이 치료하는 사역이었다. 일차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많이 해결해 주셨다. 그래서 일단 일차적인 필요를 채우시는 일을 통해 영원한 목적,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시기를 원하셨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영혼 구원이었다.
교회는 이런 필요를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따뜻해야 한다. 서로가 가족 같은 마음으로 대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복음에의 길이 열린다. 그럴 때 사람들로 부터 칭송을 받는다.
2) 세 번 째가 교회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받아들 일 수 있는 여유를 보여야 한다 그래서 칭송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냐? 14절 처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많게 된다.
5: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5: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5:16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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