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참된 믿음은 물질의 욕심을 이긴다 - 사도행전 4장 32-37절

차작가 2023. 12. 8. 14:27

성경:

32절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절 그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절 사도들의 발 앞에 두 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 이러라

36절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

37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본문 해석:

오늘 본문을 보면 자신의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눠주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럼,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먼저, 이런 일들이 발생하게 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나게 된 사건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사도들의 기도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 대주재 이심을 고백하는 것을 근거로 한 기도였다. 자신이 하나님의 주재 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됨을 믿는 기도였다.

이러한 기도에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모습은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관심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 될 것인가에 있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고 표적과 기사를 이룸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이름만 증거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사도들은 자신의 핍박과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일임을 확신하기에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자기 일보다 더 크게 여기는 모습이다.

32절에 보면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라고 말한다. 이것을 보면 초대교회의 믿음의 모습은 재물을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고 서로 나누는 특징으로 드러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초대교회가 이렇게 했으니까 우리도 초대교회처럼 재물을 나누자'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우리를 그럴 수 없으니까 아예 그렇게 할 생각을 말라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물건을 서로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믿음이니까 이렇게 하자'라는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물을 서로 나누는 것은 믿음의 증거물로 보여지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들의 기도 다음에 재물을 나누는 것이 언급되는 것은 하나님을 대주재로 고백하면서 오로지 예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은 재물에 대해서도 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증거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가 이렇게 했으니까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의도가 아니라 이것이 참된 믿음으로 되는 표적이고 기사임을 알라는 것이다. 결국 초대교회의 이 모습이 참된 믿음의 기사며 표적이라면 이 믿음의 모습을 기준으로 해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생각해 봐야 한다.

믿음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즉 하나님과 나와의 1:1관계로 끝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믿음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종교적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믿음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보고, 헌금하고, 교회에 봉사함으로써 그것을 믿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일서 4: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는 구절을 본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1:1의 관계에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증거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헌금하고 봉사한다고 해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거짓말이라는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말씀이다.

십계명에 보면 부모와 이웃에 대한 계명이 있다. 이 계명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부모도 공경해 주고 이웃도 사랑해 주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부모를 공경하도록 할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할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본문 33-35절을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4:34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 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고 말한다. 이 말씀대로 자기 것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오고 사도들이 그것으로 필요한 자에게 나눠주게 된 것은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증가함으로 무리들이 은혜를 얻었기 때문이다. 즉 은혜가 있음으로써 자연히 되는 모습이지 자기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는 무리 중에 가난한 자가 없는 것은 있는 자들이 판 것을 가져오고 그것을 필요에 따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가 있다는 것은 있는 자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겼다는 증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소유로 여기고 내어놓지 않음으로써 가난한 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곧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가난한 자는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있게 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본문의 말씀대로 한다면 우리들 곁에 가난한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믿음에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즉 내가 내 것이라 주장하고 내어놓기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보내신 가난한 사람이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을 바라볼 때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본문은 초대교회가 한 것처럼 너희도 있는 것을 팔아서 나누라는 실천 요구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우리가 과연 믿음으로 살아가는가를 묻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참 쉽게 말한다. 은혜를 얻었다느니 예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다는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은 거의 모두가 개인적인 생각과 묵상에서 나오는 말이다. 물론 그러한 고백도 귀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고백에 대한 순종이다.

은혜를 얻었고 은혜를 안다면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그리고 은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고백했으면 그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소중하다.

본문에 보면 사도들의 증거로 은혜를 얻은 자들이 자기 것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크게 곡해하여 말하고 있다. 즉 말씀에 은혜받은 증거를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심지어는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다는 것을 목사에게 가져와 바쳐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은혜를 얻은 사람들이 자기 것을 팔아서 사도의 발 앞에 두는 것은, 사도라는 한 개인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증거 한 말씀의 권능에 복종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말씀은 믿음이 성도를 어떠한 방향으로 인도해 가는가를 알려주면서 날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경계하고 고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도는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힘으로 얻은 우리 소유는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얻은 것이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주어진 것에 대해서 '하나님 이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것으로 그쳐 버린다. 즉 주어진 것을 자기 소유의 증가로 생각하면서 소유를 증가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생각해 버린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믿음은 참으로 미약하기 그지없다. 결코 자신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며 자랑할 수 있는 믿음도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해도 자기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아닐까?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도 결코 내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이고, 몇십 년 교회를 다녔다고 해도 역시 내 것에 대한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면서도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만 생각한다.

성도가 믿음에 대한 자신의 연약함을 생각할 수 있다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결정을 할 수 있다. 내 것을 쌓고 내 것을 만들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게 될 것이다.

결론:

누가복음 16:13-14절을 보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현제 우리의 주인은 누구일까? 하나님이길 소망한다. 종은 주인의 보호 아래 있다. 주인을 믿고 주인을 의지하면서 주인을 섬긴다.

그런데 돈이 나를 지켜주고, 돈이 힘이고, 그래서 돈을 의지한다면 그에게 주인은 돈이다.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믿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하나님이 힘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

성도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막연히 하나님이라는 신이 존재함을 인정해 주는 수준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만유를 다스리는 분임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면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모습이 분명 달라져야 한다.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진심으로 믿는 성도라면 물질의 욕심에서 자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참된 믿음을 소유해서 물질의 욕심을 이기는 우리가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