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오직 예수 - 사도행전 4장 12-22절

차작가 2023. 12. 8. 14:23

성경: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13절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절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15절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 돼

16절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절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절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 하라

20절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이러라

22절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본문 해석:

12절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라는 말은 그 무엇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뭔가를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장로들과 제사장 서기관들은 사도들이 예수의 도를 전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붙들어 심문을 했다. 사도들은 그들 앞에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얻을 수 있으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증거했다.

사도들은 그 어떤 힘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고집했다. 이것은 사도들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은 그리스도로 통한 구원이었고 이 구원은 자신들의 목숨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처한 상황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이 서로 다르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 외에 천하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은 없다'라는 단호한 선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이 처한 본문의 상황에 대해서 단지 구경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상황에서는 그러한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옛날 일제강점기나 공산 치하에 있던 상황에서 총 칼을 들이대고 예수를 부인하라고 위협 당하는 처지라면 본문과 같은 사도들의 말이 마음 깊이 다가올 수 있겠지만 지금은 소위 말하는 평화시대이니 만큼 예수의 도를 전한다고 해서 붙잡아 가두는 것도 없고 핍박하는 것도 없으니 사도들처럼 목숨을 내 걸고 예수의 이름을 증거해야 할 그런 시대는 아니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시대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분명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적인 상황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전도한다고 해서 붙잡아 가두는 것은 없다. 소위 종교의 자유를 말하면서 어떤 종교를 믿고 어떤 종교를 전파한다고 해도 인정해 주는 것이 국가의 법이다.

하지만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떤 종교라고 해도 국가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위협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를 인정하는 것도 국가를 위한 종교로 존재할 때 가능하다. 만약 국가를 해롭게 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종교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국가가 취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니까 마치 기독교는 무조건 국가를 반대해야 한다는 것처럼 들릴 수가 있는데 국가를 반대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 국가라는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에 존재하는 권세는 오직 하늘의 권세뿐이다. 하늘의 권세에만 복종하는 것이 기독교이지 국가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은 기독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국가라 할지라도 예수의 도가 아난 것을 요구한다면 복종할 수 없다.

신자가 복종해야 할 권세는 오직 하늘의 권세뿐이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현세적인 삶의 안정이다. 그 어떤 것도 현세적인 삶을 위협하고 흔드는 것이라면 모두 악으로 규정을 해버린다.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사도들이 전한 예수의 도가 그들의 현재적인 종교 체제를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 역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전할 때 많은 교회가 이에 대해 반발한다.

기도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 예배나 헌금 십일조 등에 대한 성경적인 참된 의미를 그대로 드러낼 때 그것을 예수의 도로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리고 그 중심적인 이유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보다는 교회의 기초를 흔들어 버린다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보호하고 진리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를 굳게 세우기 위해서 예수의 도를 도가 아니라고 하면서 거부하고 몰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의 이 시대가 신앙적으로 결코 평화로운 시대라 할 수 없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현재를 본다면 지금의 이 시대야말로 교회는 풍요로우나 복음은 빈곤하다고 말해야 할 상황일 것이다.

어쩌면 현시대는 사도들의 시대보다 더 심각하고 큰 위협 속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 현시대가 옳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인 사고에 맞을 때이기 때문이다. 즉 현대 사회는 어떤 하나를 절대적인 진리로 규정하고 그 진리에 의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고에 의해서 인정되는 것을 진리라 하기 때문에 사실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예수를 말할 때 마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세우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역시 자신들의 사고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것이기 때문에 수시로 바뀌는 것이 그리스도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통용되는 것일 뿐, 절대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시대에서 예수의 도를 전한다는 것은 분명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더욱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사도들 역시 교회 밖에서 이방인들에게 위협을 받은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위협을 받은 것이다. 절대적 진리가 없는 무리들 안에서 절대적 진리를 전함으로써 서로 조화할 수 없는 무리로 규정 받고 배척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과는 조화할 수 없다. 서로 조화하고 인정하고 타협하는 것이 세상이 볼 때는 그것이 좋은 것이고 사랑인 것처럼 보이지만 진리 안에서는 오히려 진리를 포기하는 것밖에 안된다. 그래서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독선적이고 자기 것만 옳다고 주장한다는 말을 많이 듣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 만을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론:

오늘날 우리가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예수 그리스도만은 양보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살아야 한다.

사도들로 인해서 예수의 도가 전파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말에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절)고 말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사도들의 복종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살았던 것이지 사람의 말에 복종하며 산 것이 아니었다.

신자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참으로 소중한 것임을 알 때 구원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진리로 알고 살다가는 것은 당연하다.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밖에 없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은 자로서 그 이름만을 굳게 세우는 삶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