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복음을 거부하는 자 vs 받아들이는 자 - 사도행전 4장 1-4절

차작가 2023. 12. 7. 12:10

성경:

1절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절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3절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절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본문 해석:

3장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기적의 주체자가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죽였으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를 성하게 하였음을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우신 것도 예수님의 오심을 증거하기 위해서임을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에 놀라운 일도 일어났다. 무려 오천 명이 믿게 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정도면 성공한 사역이라고 볼 수 있고 또 승승장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옥에 갇히게 된 사건이다. 사람들이 앉은뱅이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이에 베드로는 이일을 너희가 죽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선포하니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 사두개인들이 몰려와 베드로의 가르침을 싫어하여 사도들은 그들에 의해서 붙잡히고 갇히게 된 것이다. 이유는 그들이 싫어하는 것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가르침이었는데 그것을 사도들이 전했기 때문이다.

그럼, 종교지도자들이 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거부했을까? 먼저, 예수님이 공생에 기간 동안에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고 행하셨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권위 도전>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내 쫓고 백성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에 대해 물은 것은 그 일을 할 수 있는 권위는 오직 자신들에게만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자신들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예수님이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한 추궁의 의미가 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자신들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설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몰랐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은 권위를 내세울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어야 했다. 그래야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비록 제사장, 서기관, 장로의 위치에 있다 해도 그것이 권위가 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이 아닌 누구 앞에서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제사장, 서기관, 장로의 직책을 대단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 직책을 가진 자신들 역시 대단한 존재로 여겼다. 권위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자신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런 존재였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의 권위는 우리 앞에 말씀으로 나타나셨다. 따라서 말씀에 복종하고 말씀으로 오신 분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세상은 자기 가치를 챙기기 위해 권위자를 오히려 배척해 버린다. 이것이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세상의 현실이며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의 모습이었고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다. 이것을 비유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먼저,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먼저 예언하셨다. (누가복음 20:9-16)

비유의 내용을 보면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자신은 타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오래 있다가 포도를 수확하는 때에 맞춰 농부들에게서 약속한 세를 받기 위해 종을 보낸다. 하지만 농부들은 종을 몹시 때린 후에 거저 보냈다. 주인이 다시 다른 종을 보내자 역시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고 세 번째 보낸 종 역시 상하게 하고 내 쫓는 악을 행했다. 주인은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면 종에게 행한 것과는 달리 존대하리라 생각하고 아들을 보내었지만, 농부들은 오히려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고 그 유산은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로 하고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여 버렸다.

이 비유는 무엇을 말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주인이 보낸 종은 선지자이다. 농부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종이 농부들에게 매 맞고 쫓겨난 것은 선지자가 유대인들에 의해 고난받은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농부가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 쫓아 죽인 일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루살렘 밖의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가 십자가에 죽일 것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하다.

이 비유에서 드러나는 것은 농부에 해당하는 유대인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에게 하나님은 그저 죽은 존재였을 뿐이다. 물론 그들에게 하나님은 결코 죽은 존재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죽은 존재로 취급하는 것은 이방인이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고,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세우시고 지키시는 나라이며 영원히 유대인과 함께 하실 것을 믿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하나님을 죽은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위와 가치를 고집하는 것으로 드러났음.

 

권위 문제로 예수님을 추궁하는 이들은 평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실천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그것을 자부심으로 삼았다. 그러한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죽였다. 자신들이 옳다는 것과 의롭다는 것을 지키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자기 가치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분명 아무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권위와 가치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죽은 존재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것은 이유가 또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전했던 복음이 세상에서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적인 체제를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제거했는데 그가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면 결국 자신들이 한 일이 크게 잘못된 것임이 드러나는 것이 된다.

때문에 누구든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도를 가르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만 해도 누구든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만 해도 유대교에서 출교해버리는 엄벌을 가했다.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 이러라)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복음을 전함으로써 붙잡혀 갇히게 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서 보면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이 등장한다. 그러면 과연 제사장,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을 싫어했고 예수님을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도들을 가두는 것일까?

당시 제사장은 유대교의 권력자로서 성전에서의 모든 예배를 집행하고 주관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종교든 종교적 의식을 주관하고 집행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종교적 권력을 지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권력이 어떠했던가는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군중들을 모아놓고 집회를 하는 것은 그들의 소관이었는데,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도를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배척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아무런 합법적 권한도 부여되지 않은 사도들이 군중들에게 예수님의 도를 전한다는 것은 곧 그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전 맡은 자라는 것은 성전을 지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성전의 치안을 책임지며 제사장 다음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란이 일어나면 로마가 부여해 준 자기의 직책이 위태로워질 거라는 생각 때문에 예수의 도를 전하는 것을 싫어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을 포함한 사람들로서 부유하고 지체가 상당히 높은 사람들로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종교적 합리주의자들이었다. 때문에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것은 그들의 합리주의적인 사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대한다는 것조차 헛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들에게 메시아는 단지 이상이었을 뿐이지 실제 인격적인 존재로서 자신들에게 올 분으로는 여기지 않았다.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사도가 가르치는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 즉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는 헛된 일 수밖에 없었고, 자신들의 종교적인 체제를 흔들고 허물어뜨리는 한마디로 이단적인 가르침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사두개인들은 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을 지배하던 로마와의 유대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로마와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이들은 한마디로 이 세상이 중요하고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이 전부였던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 곧 그들의 복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신앙 체제를 모두 무너 뜨리는 것이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는 예수님의 선포 자체가 이 세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천국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그들의 종교 체제와는 전혀 맞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은 로마와 타협하면서 잘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의 기반을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이고, 따라서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이유도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이라는 특정 인물로 국한 지을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전부로 보고 세상에서 별 탈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이 사도들을 가두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예를 들어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복음을 아는 목사가 부흥과 성장 그리고 교회는 그저 평안하면 된다는 것을 추구하는 교회로 부임을 했다. 그러한 교회에서 순수하게 복음만을 전한다고 할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복음은 분명 기존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종교 체제를 거부할 것이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교회고 굳게 서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는 것이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자의 의가 되기 때문에 신자가 헌금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결코 의가 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는 것이 복음이다.

이러한 복음이 전해졌을 때 분명 교회에서는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복음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흔들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면서 그러한 복음 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보다 현실적인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며,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의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 교회에는 필히 싸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복음 앞에서 다른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내세우는 것이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복음이 중요한가 아니면 교회 유지가 중요한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복음을 전하는 개인이나 교회의 앞날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니까 하나님이 우리 교회는 아무 일 없도록 잘 지켜주시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앞에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붙잡히고 갇히는 사도들의 얘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갇혔지만 사도들의 가르친 말씀으로 인해서 남자만 오천 명이라는 많은 수가 예수님을 믿었다. 이것은 복음은 결코 쇠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의 안위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인해서 고난에 처하고 어려움에 처한다고 해도 복음만은 결코 쇠하지 않고 그 능력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바른 태도는 복음 덕분에 자신의 안위를 꾀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복음만 전하면 교회가 부흥되겠기라든가 복음만 전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겠지라는 생각은 모두가 복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일 뿐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산다면 평소에 복음을 말하다가도 그 복음으로 인해서 현재의 삶에 흔들림이 오고 위태로움이 올 때 현재적인 삶의 안정을 위해서 복음을 포기해 버리게 될 것이다.

복음이 있는 곳에는 삶의 형통도 있다는 약속은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이 살아가는 삶의 체제를 거부한다. 그러한 복음을 전한다면 분명히 현재적인 삶의 체제에서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가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복음을 말하지만 내 교회가 아무 일 없이 잘되고 내 삶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 안에 굳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복음으로 살아갈 수 없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삶을 흔들고 나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이 곧 사도들을 가둔 자들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다. 복음은 결코 우리의 삶을 안정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처럼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누굴까? 종교지도자들처럼 세상을 전부로 보고 세상에서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중요하고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이 전부였던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앉은 뱅이를 고치신 부활하신 예수라면 내가 현재 어떤 형편에 처해있다 하더라도 부활에 대해 소망을 두었을 것이다. 지금 어떤 자리에 우린 서 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