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5절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절 대제사장 안 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절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9절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본문 해석:
도입: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난 사건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이로 인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이나 더해졌다. 이런 일에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란 사람을 겨우 잡아 죽여서 분란의 소지를 없애 버렸는데 이제 그보다 더 큰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예수는 단지 몇 사람만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그 제자는 단 시간 내에 예수를 따르는 자를 8000이 되게 했으니 얼마나 골치 아팠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추세라면 유대 지역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의 복음도 곧 이뤄지게 되고 예수님의 재림이 곧 이뤄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예상과는 장 반대로 오히려 감옥에 갇히게 되는 상황에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복음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한다. 즉 복음은 결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때로는 복음으로 인해서 손해를 봐야 하고 고난에 빠질 수도 있음을 배워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집어넣고는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이 다 참예한 가운데 사도들을 심문하는 게 오늘 본문 내용이다.
1. 종교지도자들의 핍박 및 위협
심문의 내용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 베드로가 처해있던 분위기는 상당히 고압적인 분위기였다. 유대교에서 권력자들(1) 안 나서: 전 대제사장. 사두개인으로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 예수님이 먼저 끌려간 곳이 안나스 앞이었다. 2) 가야바: 현 대제사장. 로마가 임명하는 직책. 안나스의 사위) 만 모인 자리이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고 예수의 도를 전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 앞에서 예수를 주장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분위기에서도 베드로는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일을 행했느냐고 묻는 그들 앞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다시 일어나 섰다'라고 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다시 사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무덤에 시체가 없는 것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훔쳐서 숨겨 놓고 다시 살았다고 거짓으로 소문을 낸 것으로 여겼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것을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일을 했다고 한다면 결국 예수는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 분으로 증거 되는 것이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도들이 행한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한 것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전혀 굴하지 않고 유대 지도자들 앞에 서서 당당히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 그 가운데서 담담히 복음을 외치는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모습. 성령이 충만한 모습은?
8절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했다고 한다. 그럼, 성령이 충만하면 어떻게 되는가?
1) 첫째, 담대히 예수님만을 전한다.
4: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것을 보면 성령 충만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도 된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세상에서 이기는 자로 서려고 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주신 적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도 된 우리가 성도 됨을 지키고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성령님이시다.
성도는 어떤 상황과 어떤 현실에서도 끝까지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자로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성령 충만 다.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어둠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빛이 증거 되는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며 살아가야 한다.
오늘날 성도의 싸움은, 어둠의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세상에서 성도가 성도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이름으로 일으킴을 받은 성도에게 있어야 할 싸움이다. 성도는 세상의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세와 이름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어떻게 선언하나?
12절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 말은 그 무엇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뭔가를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장로들과 제사장 서기관들은 사도들이 예수의 도를 전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붙들어 심문을 했다. 사도들은 그들 앞에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얻을 수 있으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증거했다.
사도들은 그 어떤 힘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고집했다. 이것은 사도들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은 그리스도로 얻어지는 구원이었고 이 구원은 그 무엇으로도 심지어 자신들의 목숨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의 도를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둘째,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전한다.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비유로 모퉁이 돌이신 자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신다.(막 12:1-10)
12: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12: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12: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2: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12: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12: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2: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12: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12: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2: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3.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 비유는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성전 청소를 하시고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너는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했을 때에 답변으로 하신 비유이다. 이 비유는 포도원 지기들이 주인이 소출을 바치라고 사람을 보내면 보내는 족족 때리고 죽이고 해서 포도원 주인이 아들을 보냈더니 아들까지 죽여서 포도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 포도원 주인이 그 소출을 바치지 않은 포도원 지기들을 다 진멸하고 소출을 바칠 다른 포도원 지기들에게 포도원을 맡긴다는 내용이다.
이 비유는 단순히 욕심 많은 포도원 지기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포도원 지기들은 욕심 때문에 소출을 못 바친 것이 아니라 바칠 소출이 없었기 때문에 못 바친 것이다. 이 비유의 배경 본문인 구약의 이사야서를 한번 찾아보자.
(이사야 5:1-7)
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 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3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해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께서 극상품의 포도를 바라시고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서 포도원을 만들어 주셨는데 거기서 쓸모없는 들 포도만 맺혔다. 열매 없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꼬집는 것이다. 그렇게 바칠 열매가 없으니 열매를 요구하러 간 이사야 아모스 예레미야 말라기 호세아 등등 선지자들을 다 때려죽이고 쫓아낸 것이다.
심지어 아들이신 예수께서 열매를 요구하러 내려오셨는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열매를 요구하시니 예수님마저 죽여서 내던져 버렸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원 지기들을 다 죽여 버리시고 극상품의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새사람들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너희가 죽여서 내 버린 그 아들을 모퉁이 돌로 삼아 너희를 열매를 맺는 거룩한 전으로 지어내시겠다는 뜻이다.
모퉁이 돌은 건물의 제일 초석을 말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모퉁이 돌을 세우고 그 돌을 기준으로 거기서부터 돌을 쌓아 건물을 지어나갔다. 그 모퉁이 돌이 없으면 건물은 세워질 수도 없다.
그래서 그 예수로 말미암아 그 짓이겨질 뻔했던 포도원은 이렇게 변한 것이다.
(사 27:2-6)
2그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 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3나 여호와는 포도 원 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4 나는 포도 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질려와 형극이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5 그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
6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로다
예수를 통해서 열매 맺는 데 방해가 되는 질려와 형극, 잡초와 가시나무 같은 것은 여호와께서 밟아 뭉개 버리시고 극상품의 포도가 맺히게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오직 그 예수만이 교회의 터이고 모퉁이 돌이시기 때문이다.
결론:
예수님이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된다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로 이뤄진 교회의 중심, 즉 머리가 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12절처럼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고 선포하셨다.
건축자들의 눈에는 쓸모없는 돌로 보여서 버려버린 돌이 실제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전의 머릿돌이 된다. 머릿돌을 쓸모없는 돌로 여길 만큼 건축자들에게는 머릿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건축자들은 건축에 있어서는 전문가이다. 그런데도 진정한 머릿돌을 알아보지 못하고 버렸다는 것은 단지 자기들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전문가였을 뿐, 하나님이 보내신 머릿돌도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었을 뿐임을 드러낸다. 그들이 바로 대제사장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다.
그들이 머릿돌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은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수고와 노력들이 깨어져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수고와 노력을 깨뜨리기 위해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쓸모없는 분으로 보이고, 십자가 또한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곳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준 포도원에 살면서 하나님 덕분에 살아간다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한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오히려 그 수고와 노력 또한 하나님이 세 주신 세상 안에서의 수고이고 노력일 뿐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이뤄질 수 있다. 구원의 모퉁잇돌 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진정한 구원의 성전을 이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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