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 사도행전 3장 11-16절

차작가 2023. 12. 7. 12:02

성경:

11절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절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 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절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16절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리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으니라

본문 해석:

1. 기적을 본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개인적인 권능과 경건 때문에 그 사람이 나았다고 생각하고 주위에 모여들었다.

1) 사람들의 문제점: 보이는 게 다다.

2) 기드온의 경우: 사사기 8:22 그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8: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2. 이에 대해 베드로는 그 능력의 원천이 자기들이 아니라 그들이 죽인 예수임을 말한다.

1)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신비스러운 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자연히 그러한 일을 행한 베드로와 요한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라는 말을 한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13절)라는 말을 한다.

결국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킴으로 끄집어내게 된 말은 하나님이 주장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장하신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거다. 이

2) 이것을 베드로는 14절에서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라는 말로 이어간다.

다시 말해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은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주장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그 일을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과 회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심을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서 그분이 바로 생명의 주였음을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증거하고 말씀하고자 한 것이다.

3) 모든 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주장하신 일임을 항상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일에 대해서 인간이 주체로 나서게 된다면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결과가 될 뿐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처음부터 모든 능력은 그리스도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능력은 자신들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되심을 계시하기 위한 능력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은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님이 생명의 주가 되시는 분이었음을 증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였다.

3. 베드로가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운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된 것이라고 선언한다.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 하나님은 예수의 이름을 믿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2) 베드로는 다음의 두 가지 사건을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마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님을 찾아온 백부장에게는 이스라엘과 같은 믿음의 열심히 소개되지 않는다. 물론 백부장에게도 믿음의 삶이 있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믿음의 삶을 소개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것이 믿음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부지런히 교회 봉사를 하며 선하게 사는 외형적 모습만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쉽게 판단한다. 그래서 백부장이 예수님께 칭찬받은 이유도 같은 시각에서만 생각한다.

백부장은 말 그대로 부하 백 명을 둔 로마 군대의 장교이다. 때문에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본인의 병이 아니라 하인의 병 때문에 예수님을 직접 찾았다. 그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다. 얼마든지 강압적으로 자기 집으로 와서 병을 고쳐 보라고 명령할 수 있는 처지인데도 겸손하게 집까지 오실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말씀만 하십시오’라고 한다.

그래서 대개 백부장 이야기를 “우리의 믿음도 백부장을 닮아 주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야 하며 또 주님은 말씀으로만 어떤 병이든지 낫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라고 강조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이스라엘 식의 믿음이다. 즉 백부장같이 행동해야 예수님에게 인정받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백부장의 그러한 면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8,9절)라는 말을 들으시고 그 믿음을 인정하신 것이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한다. 직접 오실 필요 없이 말씀만으로도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알았음을 뜻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복종할 수밖에 없음을 믿는 것이다.

군대가 상관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고, 종도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당시 불치병으로 여겼던 중풍병까지도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종속되어 있음을 믿은 것이다.

이처럼 백부장의 믿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믿음의 중심에는 율법을 실천하는 자기 자신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백부장의 믿음의 차이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자신을 맡기고 있다. 예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뜻은 이미 다스려진 상태이고,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 앞에서 자신의 의나 힘에 대한 기대도 다스려진 상태이다. 오직 예수님이 존재하시는 것으로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 있음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인 것이다.

3)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본문의 내용은 잘못 이해하게 되면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이유를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하면서 결국 기도하지 않는 것이 신앙의 문제가 된다는 결론으로 내려질 수 있다.

그래서 23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는 말씀도 믿음은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지 ‘할 수 있거든’라는 말처럼 뭔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 아님을 이르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결국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막무가내식 신앙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은 그런 의미의 내용이 아니다. 28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묻는다. 이처럼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 제자들의 현실이었고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임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단지 귀신들림이라는 병적인 상태를 낫게 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귀신들림이란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형편이다. 즉 귀신들림을 정신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문제로 바라본다면 예수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귀신들린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일들은 귀신의 악한 사고방식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간을 건져내시고 귀신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하늘의 사고방식을 가진 자로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이유이고 뜻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의 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에서 계속 일어나야 하는 현상이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 현장에서 귀신이 쫓겨 나가는 일들이 항상 발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이러한 교회의 사명을 망각하고 있다.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사람들도 보면 귀신들림을 정신이상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볼 뿐 하늘의 방식과 반대되는 세상의 사고방식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귀신들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이상자의 증상이 나아진 것을 귀신이 쫓겨 간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고침은 기독교에게만 있는 고유 현상이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무당이나 불교에도 그런 일들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회는 귀신들린 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교회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 그 예가 23절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에 대한 해석에서도 드러난다.

23절의 말씀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어떤 일을 할 때 이 말씀으로 자신을 독려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믿어야 하나님이 이뤄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믿음으로 인정하신다는 뜻인데 이처럼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단의 사고방식이 믿음이라는 옷을 걸치고 교회에서 진리처럼 외쳐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지금의 현실을 드러내시면서 책망하시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산 아래로 내려오신다. 그때 산 아래의 제자들은 무리에 둘러싸여 서기관들과 변론 중이었다. 변론의 내용은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산 아래의 제자들이 고치지를 못하더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안 계신 상황에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 그때 제자들의 현실이었고, 그 현실은 지금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들으신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오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무엇이 믿음이 없는 모습일까? 예수님은 무엇을 보시고 믿음이 없는 것으로 말씀하셨을까? 기도 외에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기도하지 않은 것을 믿음이 없는 것으로 말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되면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믿음이 있는 성도라는 말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해서 자기 신앙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니다.

믿음에 대해 생각할 때 오해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을 능력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성도로 하여금 어떤 능력을 행하게 하는 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믿음이 성도에게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능력은 대개 생각하는 것처럼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는 힘도 아니다.

 

믿음의 능력은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 앞에 자기를 부인하는 자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 주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믿음의 능력이고, 자신을 바라본다면 자기에게는 구제불능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악한 모습만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것을 능력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와 신앙인들이 진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믿음의 능력을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십자가의 권능은 멸시한 체 눈에 드러나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현상들을 능력으로 여기는 이것이야말로 귀신들려 있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한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것은 믿음을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귀신들린 아이를 단지 자기 능력을 보여줄 기회로 삼은 것이기 때문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러한 물리적이고 신비한 힘을 보여주고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단에게 붙들려 귀신들려 살아가는 자기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사단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다만 귀신을 고침으로써 자기들의 능력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고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교회는 무엇보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위해 세상에 오셨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의 현실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도에게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는 자기 뜻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대답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이고 자신을 부인하게 되는 현장인데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만 능력을 행해보고자 한 그것이 믿음 없는 세대의 모습이고 산 아래의 현실이었다.

십자가를 말하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죽은 자며 죽은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이 살리셨음을 잊고 산다면 그것이 믿음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안다면 귀신들려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을 불쌍히 볼 것이고 생명이 되는 의를 증거하는 것을 자신의 모든 것으로 바라볼 것이다.

결론:

제자들을 아예 믿음이 없는 자로 말씀하신 그 이유를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앞서 말한 대로 간질병을 고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이 간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는 뜻도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이루어질 생명의 세계, 예수님으로 인해서 성도에게 입혀질 영원한 영광의 세계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싶은 것이다.

고전 13: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성도의 성도 됨은 능력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증거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병을 고치고, 심지어 산을 옮기는 능력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이 성도 됨을 증거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성도 됨은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베드로의 긍휼이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사랑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안다는 뜻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안다면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은 예수님이 이루신 생명의 세계에 마음을 두게 한다. 이것이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악함을 바라보고 나의 죽음을 절감을 하시며, 예수님이 이루신 생명의 세계에 마음을 두게 하신다. 이 믿음이 믿음으로 인정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