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절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40절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본문 해석:
1. 성령이 임한 제자들의 모습에 술 취하지 않았냐고 비아냥 거린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였으며 오직 주를 바라 보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주가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한 예수님이셨다는 것이다. 이 메시아를 너희들이 죽였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오는 본문 37절처럼 마음에 찔려서 ‘어찌할꼬’라고 물어 보게 된다.
2. 여기에 베드로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며 죄 사함을 받고(죄 사함을 위한 세례를 받으며) 그리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고 한다.
38절에 기술된 순서는 법칙이 아니다.
"고넬료 집안 구원 사건 (행 10:44-48) 성령이 먼저 임하고 세례를 베푼 사건"
10: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10: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성도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10: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 이러라 10: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10: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중요한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한 중요한 요소는 순서에 관계 없이 성령의 임함과 세례이다.
3. 38절에서 베드로가 말한 것이 구원을 얻는 순서가 아니라는 증거
1) 38절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보면 마치 구원이 우리의 회개로 시작하여 세례 받는 것으로 이어지고 죄 사함 받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구원의 조건은 회개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또 죄 사함 받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는 말도 하게 된다.
회개가 성령을 받는 조건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없는 상태에서도 회개는 가능한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결국 구원은 인간이 회개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린 것이 돼버린다.
2) 회개는 예수님 때문에 할 수 있다.
누가복음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4.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 베드로 설교에 나와 있다.
1) 첫번 째는 39절에서 처럼 ‘부르심’이라는 것이다.
‘부르심’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죄인들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이런 부르심은 인간을 통하여 특히 믿는 성도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오늘 본문의 설교를 하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뤄진다. 근데 ‘우리 교회 함께 갑시다’, 믿음 생활을 같이 합시다’ 이런 정도로는 부르심으로 충분하지 않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주를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38절 =>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 을 받으라
40절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2) 두번 째는 ‘중생(거듭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하신다.
( 니고데모의 예 )
요 3: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3: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되는 것이지 인간의 의지나 순종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한다. 즉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인간의 자연적 과정을 통해서 탄생되는 것이 아닌 영에 의한 창조를 뜻한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지금의 인간으로는 도저히 천국에 해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위대한 행함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천국에 갈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태어난 자 되게 해서 천국에 보내시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거룩한 행위를 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고 인간의 자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새로운 창조를 입은 성도는 육이 아니라 영을 따르게 된다. 성도는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던 부분이 변하여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을 믿게 하신다. 본문 37절 ‘마음이 찔려 어찌할꼬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로 인한 거듭남의 단계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과정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이제껏 교만하게 살아 온 삶을 고백하고 죄를 버리게 된다. 그래서 이런 중생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가져 오게 된다.
3) 세번 째는 회개의 단계이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회개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회개로 이끄는가?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죄인이 회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회개로 인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회개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다. 회개하고 싶어서 회개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회개한 것은 다만 인간의 뉘우침이고 종교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회개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신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자하심을 아는 성도라면 회개를 하고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당연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신을 인도하셨음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회개를 자신의 공로로 앞세워서 자신의 회개를 선의 기준으로 삼아버리고 회개치 않은 자들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나를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회개를 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를 인도하신 결과이지 결코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남이 회개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판단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도 회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만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한 것만 있을 뿐이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한 자라야 할 수 있다. 성도의 마음속에는 성령이 함께 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성령은 성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일하신다. 그런데 정작 성도 된 사람이 그리스도와 멀어질 때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을 하신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탄식하시고 간구하심으로 성령이 함께 하는 성도는 자신이 주님과 멀어진 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회개하게 된다.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회개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성령이 하도록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내가 믿음이 있어서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서 탄식하시고 기도하시기 때문에 하게 된다.
그래서 항상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자 하고 자신이 주님과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사람은 내 믿음이 좋아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서 나를 위해서 탄식하시고 간구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그럴 때 그 사람의 심령은 복음의 기쁨으로 채워진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뭔가 달라진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말씀을 가르쳐도 반응하지 않던 세상이 사도가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반응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시고 성령이 오심으로서 이루어진 새로운 세상이다.
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그 누구로부터 어떤 말을 듣는다 할지라도 반응할 수 없다. 오히려 말씀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고 달려들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런 우리가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들의 실수와 허물을 발견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성령이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성도로서 이와 같은 새로운 세상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우리를 근심하게도 하신다. 성령의 탄식과 같은 탄식을 하게 하신다. 그리고 성령의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살아가게 된다. 회개케 하는 것은 성령의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성령 받았다고 외친들 그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성령이 오셨다면 오신 흔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에 의해서 마음이 찔림을 받고 회개하게 된 것으로 증거 된다. 세례 역시도 의식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는 바로 나라는 고백으로 받는 것이다. 이 고백이 바로 성령이 함께 한 열매이다.
회개는 내가 살아가는 길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다른 길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즉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로운 세상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힘쓰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이다.
성도는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새로운 세상에서의 삶에는 회개란 있을 수밖에 없다.
회개는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가 진리임을 알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힘써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것이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회개이다.
결론:
베드로의 전도와 확증과 권면으로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고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게 되는 결실을 얻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였고 성령의 역사였다.
숫자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그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성령의 역사 하심에 늘 감사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우리를 불러 주시고 하나님에 대해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는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이 패역한 세상에서 구원해 주셨고 이젠 우리 가운데 늘 항상 계시며 지금도 역사 하고 계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늘 승리하는 우리가 되길 소원한다. 베드로가 설교 했을 때 삼천 명이 회개 하고 돌아온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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