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말세에 성령을 부어 주리라 - 사도행전 2장 16-21절

차작가 2023. 12. 1. 13:12

성경:

16절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산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절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19절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절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본문 해석:

1.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의 설교 중 한 부분이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성령을 따라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거기 모여 있던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놀라고 기이히 여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면서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고한다. 그리고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설교를 하는 것이다.

2. 베드로의 설교에서 본문은 성령이 오신 것에 대해 변증하는 내용이다.

13절에 보면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면서 한 말이다.

베드로는 "때가 제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15절)는 말을 함으로써 시간적으로 술을 마시고 취해 있을 시간이 아님을 말한다.

제 삼시는 지금 우리 시간으로 계산하면 오전 9시에 해당한다. 사람은 대개 오전에 술을 마시지 않고 모든 일과를 마친 오후에 마신다. 유대인들 역시 오전보다는 오후에 술을 마신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하는 방언을 술에 취해서 횡성수설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3. 이들에 대해서 베드로는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해 변증하는 설교를 하는데, 요엘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6-18절을 보면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오"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세상이 곧 말세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가시고 성령이 오신 것은 결국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만 남겨 놓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그것으로 세상은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의 세상은 말세라는 역사 속에 있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요엘서 2:28절의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는 말을 인용함으로써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그날이 이르렀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날이 성령이 오심으로서 너희들에게 이르렀으니 정신 차리라는 의미이다.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것은 구약에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방법이었다. 즉 하나님은 구약에서 자신의 계시를 알리는 방법으로 선지자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예언과 꿈과 환상을 통해서 계시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주어짐으로써 꿈을 꾸고 예언을 말하고 환상을 보게 된다면 결국 선지자들에게만 주어지던 계시가 성령이 임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신 지금의 시대에서는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계시가 주어지는 것은 없다. 자녀와 젊은이 노인, 즉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계시이기 때문에 목사라고 해서 따로 개별적인 계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령이 임한 모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닫게 되고 알 수 있게 되었다. 각기 다른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계시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으로서 동일한 성령으로 오신다. 그러므로 같은 성령 안에서는 같은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면 같은 마음이란 무엇일까? 어떤 행함에 대한 같은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만약 행함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같은 성령을 받은 성도는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성경을 보면 같이 성경을 보고, 한 사람이 기도하면 같이 기도하게 되는 식의 행동의 통일이 성령이 오신 이유가 아니다.

같은 마음은 19-21절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영을 부어주시면 남종이나 여종이 예언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예언은 곧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 말하게 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물론 이 예언은 단순히 장차 되어질 앞으로의 사건을 미리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세상에 되어질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으로 예언을 하게 하실 때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땅에서는 징조를 베푼다고 하신다. 그 징조는 피와 불과 연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이 확실하게 드러났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이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 속에 있음을 증거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의해서 죽으심으로 세상이 곧 어두움인 것이 드러났다. 그러한 세상에서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다.

지금 우리가 바로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비록 우리가 보기에 세상은 평화롭고 힘만 쓰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되는 지름길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면 굳이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신 이 세상이 곧 심판을 받을 어두움인 것을 알게 된다면 성도가 취하고 바랄 것은 구원밖에 없다. 어두움에서 자연히 빛을 찾고 빛을 따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이 임한 성도라면 세상을 희망으로 보지 않는다. 만약 세상에서 자신에게 희망이 되는 것을 찾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힘을 쓰는 삶을 산다면 그는 성령의 마음으로 산다고 말할 수 없다.

성령은 성도로 하여금 세상에 희망을 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세상에서 유일한 희망인 그리스도를 본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의 같은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소망을 삼는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도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에 성령이 임한 자와 성령이 없는 자의 차별이 있게 된다.

방언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의 모든 관심을 세상으로부터 예수님에게로 바꿔놓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지 않거나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지 않는 것이 곧 성령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4. 구원에 대해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원칙은 무엇일까?

그것은 21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한 대로 ‘주(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이다.

누구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법칙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라고 해도 선심 쓰듯이 밑져야 본전이니까 라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다는 것은 그런 수준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5. 예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분이다. 그런데 당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사람이 예수님만이 아니었다. 유대인들 모두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어떻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예수님을 죽인 것일까? 그 이유는 같은 여호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에 대한 생각이 달랐고, 여호와에 대한 그 마음이 달랐던 것이다.

6.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 두 사람은 바리새인과 세리였는데 이들 모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여호와를 부르면서 자신의 일을 내어 놓는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는 다름을 말한다.

이처럼 바리새인은 스스로를 하나님을 알고 최고로 바르게 믿고 있다고 장담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기도로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세리의 기도는 바리새인의 것과는 다르다.

일단 세리는 내어 놓을 것이 없다. 그래서 세리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는 말만 할 뿐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세리가 부르는 여호와가 진짜라는 것을 말씀하고 싶은 것이다.

세리의 기도에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여호와냐가 중요하다.

여호와의 마음과 그 뜻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봐야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수준에 불과하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의 차이는 무엇일까?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기적이 없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기적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는 고백이다.

이것을 왜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일까?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신의 떳떳함을 내세우는 것이 전부이다. 기도로서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리의 기도는 자신의 불우함을 하나님께 맡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기적으로 새롭게 된 인간의 모습이다.

결국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자는 정해져있는데 그들은 여호와의 기적으로 인해 새롭게 된 자로서 여호와를 부르는 사람들이다. 아무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임한 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7. 그럼,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가가 18~20절에 나온다.

17-18절을 보면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오"라는 말을 한다.

여호와의 영을 부어주심으로써 예언을 하고 꿈을 꾸고 환상을 본다고 한다. 무엇에 대한 예언이고 꿈이며 환상일까?

19-20절을 보면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라고 말하는데, 이 내용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얘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서서 바라보는 예언이고 꿈이며 환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서서 바라보는 예언, 우리의 꿈과 환상은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시는 구세주가 오신다는 것이다. 결국 여호와의 영을 부어주심으로써 심판의 날에 구세주로 오실 분을 바라보고 소망하게 하신다.

이처럼 심판의 날에 구세주를 바라보는 성도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구세주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하심을 바라보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는 세리와 같은 심정으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를 죄인이로소이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바로 이들이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여호와의 부름을 받는 것이다.

성도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독생자 아들을 피 흘려 죽게 한 십자가에서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마음을 아는 자로서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사망에 처한 나에게 유일한 희망으로 다가오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긍휼만이 심판의 날에 나를 살리는 소망임을 알기에 여호와를 부르게 된다. 이것이 여호와의 영이 임한 하나님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