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성령이 일하시는 교회 - 사도행전 2장 42-47절

차작가 2023. 12. 7. 11:58

성경:

42절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절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절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절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본문 해석:

성령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1. 가르침의 중요성: 42절

1) 어떤 가르침(교리)

* 가르침은 예수님의 명령이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가르침의 내용: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신 이유, 부활하심과 승천하심 그리고 재림에 관하여 가르쳤다.

*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가르침 내용: 누가복음 24:45-48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2) 가르침이 중요하다.

교회는 가르치는 곳이고 가르침을 받는 장소이다. 성도는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목사와 교사다. 때로는 장로도 포함된다. 가르치는 사람들을 존경해야 한다. 44절에 사도들로 인하여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도들의 권위나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말하는 것이다. 곧 그들의 가르침이 기적과 표적을 가져올 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교회가 바른 가르침에 순종할 때 비로소 교제가 일어나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 교회는 교제가 풍성해요 그러나 배우는 게 없어요라고 한다면 바른 교회가 아니다.

3) 가르침이 없으면 교제할 수도 떡을 뗄 수도 기도할 수도 없다.

*바른 가르침이 없으면 바른 교제를 할 수 없다. 세상적인 교제와 성도 간의 교제는 다르기 때문이다.

*바른 가르침이 없으면 바른 주의 만찬을 가질 수 (떡을 뗄 수) 없다.

*바른 가르침이 없으면 바른 기도를 할 수 없다. 아는 지식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바른 기도가 나올 수 있나? 그저 주문만 외울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모르니까 자꾸 나 자신만을 위하는 기복적인 기도 밖에 할 수 없다. 당시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많이 회개했던 것 같다. 그래서 기도에 힘쓸 수 있었다.

2. 새로운 시대 개막을 알림

그리고 본문(44-46)에 보면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누고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새 시대의 모습이었다.

43절에 보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는 말을 한다. 기사와 표적은 사도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베푼 일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성령이 일하시는 표적들을 의미한다. 마치 설교는 베드로가 했으되 설교를 들은 자들을 회개케 한 것은 성령이 하신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기사와 표적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기사와 표적'이라고 하면 불치병이 낫는 등의 신비스러운 일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43절에서 말하는 기사와 표적은 44-47절의 내용을 두고 한 말이다. 즉 물건을 통용하는 것, 재산을 나누는 것,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함께 음식을 먹는 것, 어찌 보면 신비스럽다고 말할 수 없는 일상생활들을 기사와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에 염두를 두어야 한다.

기사와 표적의 의미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신기한 사건이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사와 표적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시대가 어떤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서 기사와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재산을 나누고 음식을 함께 먹고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는 모습들은 무작정 현대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모본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가르치는 기사와 표적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본문에 대한 현대 교회의 입장은 한마디로 말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아름다운 공동체, 또는 현재 교회가 지향하고 실천해야 할 모범적인 교회로 여기는 것이다.

물론 본문의 모습에서 현대 교회가 무엇에서 잘못되어 있는가를 생각하고 배우는 것은 유익이 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단지 그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누어 준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은, 뭔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초대교회로서 교회를 더욱 확장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전도했다거나 선교했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소유가 없는 자로서 함께 나누는 것으로 증거 되는 것은, 성령이 일하시는 참된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소유가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적으로 자신의 소유로 가진 것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 있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때문에 비록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는 팔아서 나눌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라는 것은, 집에서 떡을 떼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 것 역시 교회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있는 재산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가진 것이 있는 자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본문은 현대인에게 재산을 팔아서 나눌 것을 강요하거나 명령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다. 기사와 표적은 미래의 일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 역시 현대 교회가 실천해야 할 사항으로 주어졌다기보다는 장차 미래에 주어질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미래를 지향하며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로서 자연히 그 흔적이 나타나야 한다.

레위기에 보면 희년(일곱 안식년 지난 다음 해)에 대한 규례가 있다(레 25장). 희년이란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이 자신의 소유를 주장할 수 없음을 알게 하는 날이다. 그래서 희년에는 종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 자들에게서 산 땅을 다시 되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4:18-19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라는 말을 한다. 이것이 곧 레위기에서 말하는 희년 사상이다.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을 누가복음의 후편이라고 말할 때 누가복음의 희년 사상과 사도행전의 본문 내용이 서로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서 자유를 전파하게 하셨다면, 성령이 오심으로 시작된 초대교회가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필요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는 육신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붙들린 자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자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는 우리가 잘 아는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부자 청년이 영생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왔을 때 예수님은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쫓으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부자 청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좇지 못하도록 붙드는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기 소유이다. 자기 소유에 붙들려 있다면, 그래서 영생을 원하면서도 예수님을 좇지 않았다면 결국 그 청년은 자기 소유에 붙들려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우리들의 모습과 같다.

이러한 세상에 성령이 오셔서 교회를 시작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보이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천국이 곧 완벽한 자유의 나라가 아닐까? 그 무엇에도 붙들리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나라가 아닐까? 그리고 그 모습이 현세에서 보이는 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사와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교회는 결코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현대 교회가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 목표를 향하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가 증거 되어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회개하고 시작된 초대교회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기사와 표적으로 증거 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초대 교회는 모여서 교회 발전을 목표로 삼고 일한 것이 아니었다.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더하게 하셨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초대교회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그들의 삶으로 인해서 된 열매였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7)는 말씀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묵상해보기 바란다. 초대 교회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리고 지금 우리 역시 교회로 모이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길 바란다.

결론:

성령이 우리를 교회로 모이게 하셨다. 우리 스스로 우리들의 목표를 가지고 모인 것이 아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성령이 우리를 붙들어서 모이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성령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지 우리들이 스스로 교회의 목표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성령이 원하는 일이 곧 우리들의 목표와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사실 현대 교회가 보여주는 것은 큰 예배당과 많은 교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애쓰는 교회도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분란과 다툼도 있고 경쟁도 있다. 성령이 일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인 것 같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 교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한다. 성도가 준비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흔적이 우리의 삶에서 보이는 것이 옳다. 예수님으로 인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배워가면서 자유자의 신앙이 보여야 한다. 이것이 성도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성령이 일하시는 교회이다. 사람이 비전을 가지고 자기 열심히 일하는 교회가 아니다.

그리고 성령이 일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