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까? - 사도행전 5장 1-11절

차작가 2023. 12. 8. 14:29

성경:

1절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절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절 베드로가 가로되 아아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절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 다

5절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절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절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9절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10절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본문 해석:

바나바가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이유 및 배경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4: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 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1) 33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큰 은혜를 받았다.

자기 것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오고 사도들이 그것으로 필요한 자에게 나눠주게 된 것은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증가함으로 무리들이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즉 은혜가 있음으로써 자연히 보이는 모습들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었다. 앉은 뱅이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시며 신자는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 힘으로 얻은 우리 소유는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얻게 하신 것이다.

2) 이 은혜가 바나바를 비롯한 초대교회 성도들이 재물을 공유하게 만들었다.

당시 믿는 사람들은 소유를 팔아서 나눴었다. 그중에서 요셉이란 사람은 교회에 많은 도움을 준 것 같다. 그래서 사도들은 요셉을 바나바, 즉 권위자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요셉은 은혜를 받음으로써 은혜에 의해서 행동하게 된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눴다. 그리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요셉을 바나바로 부르면서 칭찬을 한 것이다.

3) 바나바는 누구인가?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11: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스데반의 일로 믿는 자가 많아져서) 바울과 함께 선교 담당했다.

은혜를 입고 그 은혜로 사는 사람은 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쓰임을 받는다.

그런데 그 반대인 사람들이 등장한다. 오늘 본문처럼 5:1,2절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와 달랐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서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에게 가져온 것이 달랐다.

당시 믿는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오고 그것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줬는데, 이들 부부도 아마 그러한 것에 영향을 받아 그들도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오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판 것을 다 가져온 것이 아니라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결국 두 부부가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헌금의 문제로 인해서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비록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헌금의 문제가 잘못되면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사실 본문을 이렇게 이해함으로 인해서 많은 교회가 신자들에게 헌금을 제대로 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많다. 특히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수입에 대한 십일조를 철저하게 할 것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의 사건은 현대 교회의 신자들에게 헌금을 제대로 하라거나 십일조를 속이지 말거나 하나님께 바친 것을 떼어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3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말한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땅값 얼마를 감추는 것을 성령을 속이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도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삽비라 역시 9절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라는 말씀을 보면 사도에게 땅을 판 값에서 얼마는 감추지 않았다고 거짓말하는 것을 주의 영을 시험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본문의 중점은 이들 부부가 땅값 얼마를 감추었고, 또 그 사실을 속이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성령을 속이는 것이고 주의 영을 시험하는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본문은 단순히 처음에 작정한 대로 헌금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비록 처음에 얼마를 작정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대로 작정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얼마를 헌금해라'라고 계시해서 작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얼마든지 작정한 대로 헌금할 수 없는 형편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빚을 내서라도 작정한 대로 헌금을 해야 할까? 그것이 성령을 속이지 않는 것일까? 본문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성령을 속인다 시험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권세 역시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하나님의 권세를 말하고 있지만 하나의 상징으로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살아있는 왕으로서의 권세가 아니라 죽어있는 왕의 상징적인 권세로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왕의 지시를 불응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결코 어떤 처벌을 할 수 없는 그러한 왕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서 이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삶의 모습이다.

이들이 헌금을 속인 것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안 계신다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헌금을 속이면서도 그것을 감출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고방식이었다면 자신들의 거짓말을 사도들은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은 아신다는 생각을 할 것이고, 그렇다면 자연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헌금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게 한다. 내 안에 계시는 분이 성령이기 때문에 성령은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알고 계신다. 그런데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과연 성령이 속을까?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 내 마음을 모를까? 그런데도 속인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존재하심을 믿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신자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게 된다.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 소유를 팔기로 한 것은 처음부터 인위적인 생각이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가 보여주는 은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단지 그가 받은 칭찬에 욕심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그들 역시 자기 소유를 팔아서 헌금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은혜의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은 후) 막상 자기 소유를 버리고자 할 때 아까워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그것으로 얼마의 돈을 감추게 된 것이다.

욕심은 약 1: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탄이 조장해서 재물을 숨기게 했냐? 아니면 욕심이 사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었나? 후자이다.)

이러한 그들을 하나님이 죽이신 것은 하나님이 교회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지키고자 하시는 교회의 순수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인간의 수단과 인간의 방법으로 세워지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굳게 세워지는 교회가 하나님이 지키시고 굳게 세우고자 하시는 교회이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다스리신다.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겠다는 의도로만 모여져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순수함이다. 교회가 이것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성령도 안중에 없고 오로지 인간적인 생각만 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지 않는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은 오늘 본문의 사건이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생각하고 교회로 모여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고 계심을 잊지 않고 모여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된 우리의 사명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아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어 바나바와 같은 주님의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