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17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절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 돼
20절 가서 성전에 서서히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절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절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23절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눈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절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절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절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 이러라
본문 해석:
(오늘의 흐름)
1. 복음 전파 방해 요소는 시기심
2.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핍박이 있다.
3.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신다.
4. 우리는 어떤 위협에서도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도입: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어려움이 생길까? 복음을 전하는데 왜 어려움이 생길까?
5: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5: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 시기는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경쟁적인 감정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에 대해 비교해서 드는 마음이다. 사도들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이런 시기심이 생긴 것이다. 자기들의 가르침에는 움직이도 않다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니 불길같이 확산되어서 생긴 시기심이다. 게다가 믿는 사람들이 수천이나 생기고 칭송까지 받으니 더 그랬다. 소수가 믿으면 괜찮을 텐데 많은 수가 믿으니 마음이 불편해지고 시기심을 갖게 되었다.
사두개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에 대해 기뻐해야 할 것이다. 시기심이 있으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에도 기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라면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이라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이 정상이다.
사두개인들은 정치가들이다. 정치가들은 군중들의 인기를 얻고 사는데 군중들의 관심이 사도들에게 가니까 점점 영향력을 잃게 될까 봐 전전근긍하게 되었다.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는 것들이 없어 질까 봐 두려워했다. 이런 기적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는 두려움이 있었다. 결국 이런 시기심 때문에 사도들이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럼, 왜 복음을 전하다가 어려움을 당하게 될까?라는 생각이 든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2. 복음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요 15: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 속한 자는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신자가 대개 믿음에서 생각하는 것은 기쁨을 누리고 천국을 소망하면서 평안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지 신자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부분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세상 속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 정도로 생각할 뿐이지 본문의 말씀처럼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때로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고 반대를 받는 일이 있을 때 당황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도 복음을 전하며 핍박을 받으셨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만을 말씀하셨는데도 세상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핍박하고 죽였다.
그렇다면 신자가 누구인가? 신자란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는 사람을 일컫는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예수님처럼 미움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이 미워하는 것으로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 증거 된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반응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가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신자가 바르게 살면 세상이 변한다’는 것이다. 이것처럼 큰 착각은 없다. 신자가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세상은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할 것을 기대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는 것이다. 신자가 바르게 살아서 세상이 변한다면 무엇 때문에 아들을 보내서 죽게 하실까? 차라리 신자를 많이 만들어서 바르게 살게 하시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그리고 또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신자를 만들어서 그들을 바르게 살게 해서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세상을 다 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신자가 신앙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누군가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유는 예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속한 자가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예수님께 속한 자는 예수님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바르게 살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을 원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나와 가까이함으로써 자신의 더러움과 악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현대 교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에 난감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대다수의 현대 교인들은 은혜를 자신의 ‘잘 됨’으로 연결한다. 은혜를 곧 축복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은혜를 고난으로 연결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믿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다.
디모데후서 3:12절에서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이것 역시 현대 교회가 신앙에 대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이 아닐 수 없다. 현대 교회가 기대하는 것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복이 아니라 핍박이라고 말한다. 경건하게 살고자 한 대가가 복이 아니라 핍박이라면 누가 과연 경건하게 살려고 할까? 그러나 분명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인 사람들, 그리스도가 생명인 사람들, 그들만큼은 그 어떤 결과에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갈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은 단지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경건이 윤리적 사고에서의 인격과 인품, 그리고 도덕적인 선한 일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핍박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경건은 그리스도가 사셨던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왜 이것이 핍박으로 다가오는지는 실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모순된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신앙인으로서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서 직접 체험하고 배워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함으로써 배워 가는 것이다.
복음과 삶의 관계는 참으로 민감하다. 왜냐하면 복음이 생계 문제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충성을 망설이게 하고 위협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의 삶은 곧 ‘생계’ 자체이다. 생계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며, 생계에 위협이 되는 일은 피하려고 하는 것이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서 불법과 타협을 하기도 한다.
빌 1:29절의 말씀대로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게 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한다. 자기를 위한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다. 고난이란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경우에서든 자신의 유익과 생계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고난은 육체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고 가시관을 쓰는 육체적 아픔을 고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을 버리고 대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통을 우리도 똑같이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사셨을 때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유익과 생계를 위한 선택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한 선택을 하셨던 것처럼 신자 역시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을 세우기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고난을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은혜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은 죽음도 막지를 못한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며 복음의 위대함이다. 오
5: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이 본문처럼 사도들이 처한 난관에서 역사하셔서 그들을 구해내기도 하시지만 그 기적이 계속 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주의 사자를 보내서 옥에 갇힌 사도들을 구해내시지만 그 사도들이 나중에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할 때는 그냥 그대로 둬 버리셨다. 옥에 갇힌 그들을 구하셨다면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할 때도 천사를 보내서 구하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옥에서도 건지시는데, 왜 어떤 경우에는 그냥 두고 죽게 하실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생각이다.
오늘 본문의 기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구절은 19-20절의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들을 옥에서 구해내시는 것은 다만 사도개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도가 옥에 갇힌다면 그것은 사도 개인이 어려움을 받고 곤란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 전파되는 일이 방해를 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이 전해지는 하나님의 일은 그 무엇으로도 방해받을 수 없고 막을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도들을 구해내신 것이다. 이것이 사도들이 기적으로 옥에서 나오게 된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들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그 무엇으로도 방해할 수 없고 막을 수 없음을 증거하시는 기적인 것이다.
기적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적은 그때만의 기적으로 중지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기적이 그때와는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정작 하나님의 기적의 간섭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기적을 기적으로 보지 못하고 기적으로 생각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베푸시고 있는 기적은 무엇일까? 어떠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은 중지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기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인도하신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곤란에 처하게도 하시고, 또 필요하다면 곤란에서 건지기도 하시면서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God's purpose for Peter and John was for them to "go, stand and speak" to the people again. The Greek is strong, demanding boldness and courage.
"Go": 지금, 즉시 가라는 뜻
딤후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로 부터 구원 받은 이유는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라.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으로만 생각했지 왜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했는지를 몰랐다. 그들은 다른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보여 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 생각하는 바람에 실패하게 되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구원에만 머물면 실패할 수 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결국 현대 교회에서 십자가는 교회 부흥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치워 버리고 그 자리에 인간의 열심과 인간의 공로를 집어넣음으로써 자신의 행위에 희망을 둔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에게 두고 있는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빼앗아 버리신다. 인간에게 희망을 두는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하신다. 그리고 유일한 소망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신앙은 고난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자신이 고난의 길을 간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복음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복음을 십자가 지신 예수만 믿어주면 되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를 고난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인한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은, 복음을 알게 되었으면 사도처럼 고난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즉 복음이 복음을 받은 자를 고난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난을 환경 문제로 여기면 안 되는 것이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그러므로 신자는 전도인의 직무에만 힘을 쏟으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바른 교훈의 말씀을 그대로 전파하며 사는 것이다.
히 4:12-13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이다. 우리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며 모든 허물과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그리고 내가 곧 심판을 받아야 할 자임을 철저히 알게 하신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어떠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경책하고 경계하며 부끄럽게 한다. 그것이 내 안에 말씀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이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직무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내 자신부터 나를 경책하고 경계하는 말을 거부하고 싫어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전도인의 직무에 힘쓸 수가 있을까?
그러므로 말씀을 전파하라는 이 말씀에서 먼저 내 자신이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진심으로 원하고 사모하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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