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성도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 사도행전 6장 8-15절

차작가 2023. 12. 10. 13:29

성경:

8절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절 리버디노,구레네인,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10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11절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절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절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절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절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본문 해석:

세상의 사고방식에는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돈만 주면 하고싶은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돈이 우선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돈보다도 다른 것을 더 우선하는 것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돈을 줘도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돈을 우선으로 하고 산다면 그런 사람은 돈이면 뭐든지 다 되지 않을까?

그런데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재산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돈으로 살아가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목숨까지도 신경 쓰지 않고 복음을 고집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이다. 자기 삶이 우선이고 복음은 뒷전이다. 우선 내가 살고 복음이 있는 것이지 '복음이 있고 내 인생이 있다'라는 삶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내 인생보다도 복음을 우선으로 하면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스데반은 복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다. 즉 자기 목숨보다 복음을 우선으로 한 사람이다.

15절에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라고 말한다.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말하고 있다.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은 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만을 바라봤고, 한 분만을 의지하고 살았던 믿음으로 인한 모습이다.

사실 우리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지 못한다. 스데반과는 분명 다른 얼굴일 수밖에 없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스데반은 오직 복음 하나만을 생각했고 우리는 복음 말고 돈과 내 인생까지 함께 생각했기 때문이다. 돈과 내 인생까지 함께 생각하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인생으로 인해서 실망하게 되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얼굴에서 천사의 얼굴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스데반은 하나님이 주신 참된 진리를 발견한 사람이었고 그 진리만이 자기 인생의 길이 됨을 아는 사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자신의 인생에 의미이고 희망임을 알았다. 때문에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소망을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스데반이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고 살아간다면 우리도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해 예수님보다는 돈이 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런 우리에게 어쩌면 예수님이 강한 힘이 아니라 돈이 더욱 강한 힘으로 우리를 붙들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우리에게 스데반의 이야기는 많은 가르침을 준다.

8절에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말한다. 이것을 보면 스데반은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런데 이러한 스데반이 오늘 본문에서 말한 대로 체포되어서 공회에 끌려오게 되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돌에 맞아 죽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가지고 있는 불만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때 나타나 주기를 원한다. 스데반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이 나타나야 할 때는 그가 돌에 맞을 때라고 볼 수 있다. 돌에 맞아서 죽어갈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를 구해내서 스데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는 것이 옳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 가는데도 잠잠하셨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삶에서 배운 것이 '내가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지 않으시더라'라는 생각이 쌓이고 쌓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어떤 기대도 갖지 않게 된다. 즉 천국을 가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은 필요치 않고 도움도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을 말은 하지만 정작 기대는 하지 않고 살아간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도우셨다거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확인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우린 항상 세상 것을 기대어서 자신감을 가지려는 습성이 있다. 세상은 오직 세상의 것을 얼마나 소유했느냐를 근거로 해서 그 사람을 대우하기 때문에 세상 것이 있을 때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습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도 세상의 것을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세상이 알아주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증표라고 생각하게 된다. 때문에 만약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모습으로 전락이 되면 하나님에 대해 반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자신을 증거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통해서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셨다.

본문의 스데반이 바로 그 길을 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은, 하나님이 스데반의 일에 개입하지 않은 결과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하신 결과이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세상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시는가를 드러내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스데반이 죽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한다. 하나같이 세상에서 성공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증거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결국 그리스도 말고 다른 것을 보고 살아간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증거 되는 것이지 세상의 성공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내가 잘 됨으로 하나님이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으로 하나님이 증거 된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고통과 어려움에 버려 두기도 하신다.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오직 믿음을 고집하는 것을 통해서 믿음이 얼마나 강한가, 믿음의 능력을 증거하신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은 스데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길래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스데반에게 요구하신 것은 죽음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일 수 있다.

결론:

믿음은 내가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이다. 내가 죽고 대신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 믿음의 길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때 그분이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살았다. 그분으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때문에 날 위해 죽으신 그분 안에서 이제는 그분을 위해서 내가 죽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고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이다.

우린 자꾸 세상을 이기려 한다. 물론 신자는 세상을 이겨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믿음으로 굳게 서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말씀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너무 신경을 쓰는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못한다. 우린 주님을 위해서 쓰이는 것보다는 세상에서는 편한 인생을 더욱 소망하고 기대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가게 하시는 길을 외면해 버릴 때가 많다.

이런 우리에게 스데반의 이야기는 신자가 무엇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다. 스데반의 이야기 앞에서 부끄러움이 있어야 하고 우리의 잘못됨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스데반이 부름받은 것처럼 우리도 부름받았음을 알고 신자로서 걸어야 할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