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교회란 이런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능력이다'는 것을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교회 됨이 무엇이며 교회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교회의 능력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적인 능력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루시지 않으신다. 천하에 흉년이 들게 하셨을 때 흉년 속에서 교회만 무사하게 하셨다면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볼까?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 아닐까? 천하가 재난에 시달릴 때 교회만은 무사하고 모든 재난이 피해 갈 때 세상은 그런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이 진짜 살아 계시는 것이 아닌가?'라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으신다.
천하가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에 있는 교회나 유대에 있는 교회들 모두 흉년에 시달렸다. 이것이 무슨 교회의 능력이라 할 수 있겠겠는가? 이러한 모습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흉년 속에서 안디옥의 제자들과 유대의 제자들의 관계를 통해서 교회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그것은 흉년 속에서 자기를 지키기보다는 형제의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교회의 능력이다.
교회의 능력은 자기의 상황과 형편을 보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믿음으로 존재한다. 우리를 잘 되게 해주실 것임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믿고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교회의 능력이다. 즉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능력이다. 이 능력이 우리를 평안에 거하게 한다.
본문 해석:
오늘 본문도 지난주에 이어서 교회와 성도의 진짜 능력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12:1 그 때에 헤롯 왕(헤롯 대왕 손자, 아그립바 2세)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변화산에 있었던 핵심 3인방)를 칼로 죽이니
12: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똑같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똑같이 복음을 전하기에 힘쓰고 있는데 한 사람은 잡혀 죽게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잡혔다가도 천사로 인해서 살아남았다.
시편 91편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오 나의 요새시라는 말씀이 헤롯에게 죽임 당한 야고보에게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생각은 나에게 유익이 되느냐를 생각한다. 죽음 보단 사는 게 낫다는 것이다. 죽은 야고보 보다 구출 당한 베드로가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차별 대우하시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죽음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은 절대 악한 거나 나쁜 것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어떤 일에서도 교회 됨을 보여줄 수 있는 교회로 만드시기 위해서 야고보를 죽이는 일을 허락하고 베드로는 살리신 것이다. 즉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니 어떤 일에서도 두려워 말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5절에서 교회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 이유는?
당시 교회는 야고보가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까지 옥에 잡히자 많이 염려를 했다. 바로 그러한 염려 속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 야고보를 죽게 하고 베드로를 잡히게 하셨다. 그리고 베드로를 살리심으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음을 가르치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 다르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 이럴 때 서로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형태로 쓰임을 받든지 오직 주를 위해서 쓰임 받도록 하기 위해서 때로는 야고보로 때로는 베드로로 쓰신다.
교회나 믿는 자들은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증거해야 한다. 교회는 아무것이 없어도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감사와 기쁨으로 모여야 한다. 이것이 하나 된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때로는 야고보 같은 신자가 있게 하시고, 베드로 같은 신자가 있게도 하신다.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감옥에 갇혀있는 베드로의 모습이다.
쇠사슬에 묶인 채 잠을 자고 있는 베드로에게 천사가 찾아와서 옆구리를 쳐서 깨우셨다.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야고보처럼 죽을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은 풍랑 속에서 주무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한다. 분명 베드로는 어떤 환경에서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안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죽는 것조차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쇠사슬에 묶인 채 잠을 자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볼 때 과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믿음의 능력은 세상일에 대한 모든 불안감을 물리치고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믿음을 말하나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주께 맡긴 안식을 누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기도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도란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잘못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 뜻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에게는 개인의 삶이 없었다. 다만 하나님의 일을 위한 삶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죽고 사는 모든 문제 역시 하나님께 붙들려 있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시는 이상 누구든 베드로를 마음대로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다.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자에게 주어진 권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주님의 일을 하는데 두는 것이 아니라 내 소유를 키워가고, 개인의 행복을 만들어 가는데 두고 있다. 이것 때문에 신자의 능력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하신 것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이라면, 오늘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자리까지 인도하시고 지켜주셨다면 그것은 우리 개인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필요하셨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자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한다.
신자는 인생에서 하나님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발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직장을 다니면서 자식을 키우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식조차도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임을 알아야 한다.
감옥에서 구출된 베드로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한 일을 말하고 이 말을 전하라고 하고는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났다. 어찌 보면 놀라운 기적까지 체험한 사람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너무 싱겁게 끝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우리 같으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기적을 말하며(요즘 같으면 간증 집회하고 다니며) 하나님을 높이는 척하면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난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만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높이고자 하는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을 무슨 큰일을 해야 하고, 위대한 일을 하는 힘으로 오해를 한다. 그러나 믿음의 위대함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인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사람은 오직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만 행동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성품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만 행동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이 자신의 유익이 있는 곳으로만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 말씀이 자신에게 유익을 제공하지 않을 때는 외면해 버린다. 그래서 무엇을 하면 하나님이 복 준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즉 말씀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복 때문에 행동한다. 이러한 인간을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인간이 되게 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자신보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인간으로 고쳐가시는 능력이 믿음에 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구출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어떻게 인도하시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베드로를 구출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야고보도 구출할 수 있었지만 죽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하신 일임을 가르치셨다.
다.
결론:
결국 사도행전은 한 개인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누가 어떤 기적을 체험했건 또한 기적을 베풀었건 상관없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인간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는 것이 사도행전의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셨지만 여전히 세상에서 일하신다.
믿음은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믿음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되는 일임을 보게 한다. 그것이 기적이든 고통이든, 혹은 죽음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되지 않은 일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어떤 일을 가지고도 자신을 높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의 뒤로 감추는 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이 우리를 어떤 형편에서라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만 전하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사도행전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당히 전해야 할 복음 - 사도행전 13장 42-52절 (0) | 2023.12.14 |
---|---|
한 영혼을 위하여 - 사도행전 13장 1-12절 (0) | 2023.12.14 |
그리스도인입니까? - 사도행전 11장 19-30절 (0) | 2023.12.14 |
생명을 얻는 회개 - 사도행전 11장 1-18절 (0) | 2023.12.13 |
베드로가 전한 복음 - 사도행전 10장 24-48절 (0) | 2023.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