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당당히 전해야 할 복음 - 사도행전 13장 42-52절

차작가 2023. 12. 14. 13:43

도입:

전도를 할 때 우리는 어떻게든 상대방이 반감을 가지지 않고, 교회에 대해 좋게 생각하게 하려고 노력을 한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그러한 의도가 있다는 것에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믿게 하는 능력은 복음에 있는 것을 망각하고 복음에다가 자신의 인격을 보태서 교회에 호감을 느끼게 하려는 이것은 결코 전도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신자를 복음을 파는 외판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즉 전도하는 것을 복음을 파는 것으로 비유하고, 찾아다니며 팔기 때문에 외판원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복음은 파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것이다. 선포란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힘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할 일은 믿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것이다.

 

본문 해석:

바울과 바나바가 구부로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서 거기서 38~39절 처럼 복음을 전했다.

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A. 복음을 전한 뒤 두 가지의 반응을 볼 수 있다.

1. 첫 번 째 부류

45절: 유대인들의 반박 => 시기 (43절에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기 때문에)

바울은 이런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여겼냐면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여겼다.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 전하는 자들을 박해 한다(50절) 이에 대해 바울은 발의 티끌을 털어버린다.

이 말씀들을 보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하면 저들을 믿게 할까?’라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친한 관계가 되어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는 그것으로 그들을 떠나 버렸다. 이러한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복음의 권위이다.

오늘날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닌가 싶다. 복음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이 권위는 복음이 사람을 택하고 부르는 것이지 사람이 복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포함되어 있다. 즉 복음은 나를 택해 달라고 기다리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내 백성인가를 찾아다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쉬울 것도 섭섭할 것도 없다. 믿어 달라고 사정할 이유가 없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거부가 될만한 말을 빼버린다거나 말을 바꿀 수 없다.

 

2. 두 번 째 부류

44절: 온 시민이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였다.

이런 사람을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 찬송하는 사람들이다.

선택과 예정의 교리:

1. 말라기 1:2-3, 롬 9:11-13

2절 하반절과 3절을 보면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라고 하신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 사랑이고 미움이다. 야곱과 에서의 인간 됨을 보시고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를 구분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할 자로 야곱을 택하시고 미워할 자로 에서를 택하셨다.

하지만 이것은 에서가 미움을 받지 않아야 하는데 미움을 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애당초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자로 태어난다. 따라서 에서는 미움을 받을 자로 남겨진 것이고, 야곱은 미움을 받을 자에서 사랑을 받을 자로 택함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으로써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 받을 수 없는 자를 택하시고 사랑하신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된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오직 선택을 근거로 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역시 하나님의 선택을 근거로 해서 설명하고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신자의 존재는 하나님의 선택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시지 않았다면 신자는 존재할 수 없다.

2. 엡 1;5,9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3.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세우시고 허무 시는 분이고 살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는 분임을 확증하시고자 하신다. 즉 선택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자기 증거이다.

이런 면에서 복음은 다른 종교와 경쟁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복음은 오직 택한 자를 찾는 것이지 많은 사람을 찾아다니면 많이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를 믿는 사람이 많든 유교인들 이 많든 복음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택한 백성에게만 관심을 둔다. 택한 백성이 비록 100명, 10명, 단 한 명이라고 해도 택한 자를 찾았을 때 그것으로 복음은 충족된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전도의 의미도 기존의 생각과는 달리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결론:

우리는 될수록 많이 전도해서 많은 사람을 믿게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무조건 많이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을 찾으시는 것에 있다. 우리의 힘으로 믿게 할 수 없음을 안다면 우리가 할 일은 다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믿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다만 생명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으로 인해서 스스로 멸망의 자식임을 자처하는 모습에 불쌍히 여기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

전도는 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알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선포를 의미하는 것이지 많은 사람을 믿게 하라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믿게 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전할 뿐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이것은 복음을 믿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복음은 우리 스스로 깨닫고 이해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할 때 믿을만해서 믿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부터 복음의 권위 아래 살아가야 한다. 복음이 나를 찾았고 복음의 능력에 의해 믿게 되었음을 우리의 삶을 통해 증거해야 한다. 그것은 믿음을 자신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지 않은 것이다. ‘나는 복음을 믿을만한 사람이 못 되는데 복음이 능력으로 나를 믿게 만들었다’는 고백으로 살아가는 것이 복음의 권위 아래 사는 것이다.

복음은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택한 자에게만 복음이 복음으로 남게 된다. 오늘 우리가 바로 택한 자의 범주 안에 드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복안에 있는 것이다. 복음은 믿어 달라고 사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생명의 말씀이다’라고 선포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복음의 권위가 무엇인가를 알고 이 권위 아래서 흔들림 없이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