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받음 - 사도행전 15장 1-11절

차작가 2023. 12. 14. 13:46

도입

최초의 종교회의가 열렸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15: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본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이 과연 맞는가를 살펴 보기 위해서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 봐야 한다. 창세기 17장으로 가보자

창세기 17:9-14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할례를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의 표징으로 세우셨다. 14절에서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할 정도로 할례 언약은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이것은 할례가 단지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할례의 의미를 모르고 할례를 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때문에 유대인의 할례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들은 할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 채 몸에 할례를 행한 것만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지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할례를 언약으로 세우신 것은 몸에 하는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신 10:1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또한 롬 2:28,29절을 보면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에 행한 할례가 진짜 할례고 마음에 할례를 행한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인 것이다.

 

할례는 포피를 베는 것이고 포피를 베는 것은 남자 생식기의 끝을 자르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끝만 자르는 것이 아니라 생식기 전부를 자르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만 생식기 전부를 자를 수 없기 때문에 끝만 자르게 하여 언약의 표징을 몸에 남겨 두게 하여 표징을 보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어떤 언약에 의해 살아가는가를 잊지 않아야 했다.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 버린다면 아이를 낳을 수 없다. 따라서 할례는 육신의 자손이 끊어짐을 의미한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라고 말한다.

후손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육신의 후손은 없음을 뜻한다. 그런데도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육신의 후손이 아니라 다른 후손이 있을 것을 가르친다.

다른 후손이 곧 약속의 후손이다.

 

물론 약속의 후손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을 통해 태어난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과는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에 의해 태어난 자손이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할례는 자신이 육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존재하고 있음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2절에 보면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라고 말한다.

할례는 아브라함 집에서 난 사람만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사람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샀다면 그도 이방인이다. 이방인일지라도 할례를 받으라는 것은 할례는 아브라함 혈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이처럼 할례는 아브라함이라는 육신의 혈통을 부정하고 있다.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행한 그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육신의 조건과 힘으로는 존재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때문에 믿음은 신자를 항상 자기 부인으로 이끌어 간다. 자기 부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조차도 육신의 힘과 조건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이다.

이것을 골 2:11절에서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라고 말한다. (거짓 교사들이 가르침)

육의 몸을 벗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부인되는 것이다. 그런데 육의 몸을 벗지 못함으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하게 된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되어 진다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창 15:7절에 보면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한다.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재물을 준비하여 반으로 쪼개 놓게 하고 해가 져서 어두울 때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심으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언약을 이루실 것을 보여주셨다. 아브람과 같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홀로 지나가시는 것은 아브람과 상관없이 하나님 홀로 언약을 이루실 것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아브람이 할 일은 없다. 다만 불안도, 의심도 없이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으며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 안에서 누리는 안식이다. 하지만 아브람은 자신의 조건을 봄으로 언약을 믿지 못했고 그 결과 이스마엘을 낳았다. 어떻게든 아들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할례 언약을 세우신 것은 이스마엘을 생산한 아브람의 생각이나 방법, 노력은 결코 용납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믿음을 인간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말하는 것은 이스마엘을 생산한 아브람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할례 언약인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만 생각한다. 자신에게 어떤 행위가 있는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심으로 생명의 길로 가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은혜만을 바라보는 것이 곧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할례의 의미이다.

 

그래서 할례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15: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은?

복음에 대한 율법의 역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는 데 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자신의 죄를 알아야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밖에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율법이 비록 ‘하라’ ‘하지 말라’라는 명령으로 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아신다. 그러므로 율법에 순종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을 믿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은 틀린 것이다.

베드로의 설명

7-11절까지의 베드로의 변론을 보자.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가 한 말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을 말한 것이다. 고상하고 수준 높은 말로 치장한 신학을 얘기해야 복음이 복음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이 이루어짐을 말한다면 그것이 곧 복음이다.

이러한 복음은 절대로 인간의 행위로 증거 되지 않는다. 복음, 즉 진리는 어디에서든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평안을 가질 때 그것이 곧 진리 안에 거한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거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행위를 볼 수밖에 없다.

율법의 정신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 역시 복음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실천의 요구로 포함된 것이 아니라 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역할로서 포함되어 있다.

베드로는 율법을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라고 말했다. 율법은 이스라엘도 능히 이루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자신도 메지 못하면서 남에게 메게 하는 것과 같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충분하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위해 보태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다만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면 행위가 없어도 되는가?’라는 반발은 끝까지 행위를 버리지 못하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신자에게 있어서 행위는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만들어 내는 자연스러운 열매이다. 그 열매는 구원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열매로써 나무를 아는 기능임을 알아야 한다.

8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말씀한다. 이 말씀대로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새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됨으로써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성령은 할례를 행한 자에게 오신 것이 아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오신 것이 아니다. 또한 성령은 주일을 지키고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자신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를 변화시켜서 자신은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로 살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율법은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이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에 거하는 신자에게서 맺어지는 열매들이다. 그러나 사랑을 했기 때문에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 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게 됨을 말한다.

신자에게는 무엇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장소나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의지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진리를 안다고 하기보다는 항상 여러분의 신앙이 진리에 거하는가를 확인하며 살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