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내 뜻대로 안될 때 - 사도행전 16장 6-10절

차작가 2023. 12. 15. 11:47

도입

사업이 생각대로 되지 않거나 자녀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나타날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살다 보면 아무리 완벽하게 계획해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길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를 본문을 통해서 알아 보길 원한다.

본문

바울은 자신의 전도 생애 동안 총 3차례 전도 여행을 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의 시작 부분이다.

2차 전도여행의 본래 목적은 1차 전도여행 고린도를 방문하여 그들의 믿음을 굳게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들은 1차 전도여행의 도시를 넘어 더 서쪽으로 길을 잡는다. 더베를 지나 루스드라에 와서는 디모데를 만났다. 비시디아 안디옥 방문을 마친 바울 일행이 길을 돌이켜 돌아가기보다는 자신들이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곳으로 가 복음을 전하고 소아시아 서쪽 항구 도시에서 배를 타고 시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했다.

6절에 "성령이 아시아(현재 한국이나 일본 등의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터키 지역을 말한다.) 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로마 당시 아시아라는 지방이 있었다. 아시라는 지방 이름이다.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계시록의 7교회가 그 지역에 있었다 .

사도 바울과 그 일행(디모데 및 누가)은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서쪽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 계획을 막으셨다.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그래서 7절처럼 무시아라는 곳에서 그들은 이젠 북쪽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다. 다시 한번 실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9절에 보면 바울이 밤에 환상을 보는데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청하기를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일행이 마게도냐(유럽)로 가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마게도냐는 지금의 그리스 지역을 말한다. 이렇게 해서 복음이 아시아보다 유럽에 먼저 전해지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이 바울을 인도한 결과였다.

이처럼 자신의 뜻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 주는 사건 중의 하나가 요나 사건이다.

<요나의 예>

먼저 2절을 보면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고 한 내용은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면 니느웨의 악독을 책망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요나는 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을까? 니느웨의 악독, 즉 그들의 죄를 외치라고 하신 것은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의 심판을 경고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요나에게 이방 나라인 니느웨는 멸망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이유는 왕하 14장을 배경으로 하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왕하 14:25-27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 보면 선지자 요나가 등장한다. 요나는 아모스 선지자와 함께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에 활동을 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초대 왕인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던 때였다. 이처럼 죄에서 떠나지 않은 이스라엘에 요나를 보내서 심판을 선포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할 것이라는 말씀을 외치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죄가 가득하여 심판을 받아야 할 이스라엘에게 영토가 회복된다는 은총의 말씀을 외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는 형편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나가 외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 영토가 회복되고 나라가 강대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도울 자도 없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보신 자비와 긍휼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요나는 이스라엘이 죄에서 떠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토를 회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경험했다. 그렇기 때문에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고 하시는 것도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서 회복하기 위함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본다면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오직 멸망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이방 나라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고 구원을 받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니느웨로 감으로써 그들이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요나 자신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와 반대편에 있는 다시스로 가기로 하고 욥바로 내려가서 배를 탔다. 3절에서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지라"라는 내용을 보면 당시 상황이 마치 하나님이 요나를 돕고 계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요나의 입장에서 일이 자기 생각대로 잘 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나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을 때 하나님은 풍랑으로 요나를 다스리신다. 즉 욥바에서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것이 요나 생각에는 일이 잘 풀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바다로 나가게 하셔서 물고기 뱃속에 삼키게 하기 위한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신자는 현재의 일이 잘되고 못 되는 것에 마음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의 인도에 마음 두기를 힘써야 한다.

요나는 결국에는 니느웨로 가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자 회개하고 돌아오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반면에 자신의 의지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을 우리는 요셉의 경우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요셉의 예> 형들에게 노예로 팔려간 후 보디발의 감옥에서 총리까지 된 요셉.

이들은 요셉이 그동안 야곱 때문에 자신들에게 보복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요셉에 대한 오해였다. 요셉은 야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보복을 하지 않은 것이다. 보복을 하고 싶은데 참은 것이 아니라 아예 보복이라는 생각조차 없었다. 형제들의 악행으로 애굽에 팔렸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애굽으로 먼저 보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었기 때문에 형제들을 미워하고 악으로 갚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신자가 세상을 요셉과 같은 시각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셉은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애굽으로 가게 된 것도 형제들의 악행에 의한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 보게 된 것이다.

 

창 50장 20-21절에 보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자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고 또 위로할 수 있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두 번의 성령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바울을 보면서 우리와는 다른 여러 가지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때 선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은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어느 곳을 전도하자 든가 어디를 선교하자는 계획을 세우면 그 계획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한 계획이니까 무조건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어땠을까?

바울이 아시아로 가고자 한 것은 분명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지 여행도 돈을 벌기 위한 목적도 아니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선한 뜻을 왜 막으시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비록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복음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점이다. 신자란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북종 하는 사람이지 하나님의 마음에 들 만한 계획과 뜻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고 힘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잠언에서,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인간이 비전을 세우고 계획하는 것이 옳지만 그 계획은 하나님의 의지에 맡겨야 하고 하나님은 거부권도 있다는 것에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으며 또한 그의 인도하심을 받아 드렸다. 그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항상 하나님 께 맡겼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하나님의 인도 없이는 안개 같은 인생이다.

자신의 계획한 것들이 좌절 된 후에도 바울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처럼, 우리가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 우리를 지금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만날 수 있다.

결론

바울처럼 선한 뜻을 가지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막으실 수 있다. 요나처럼 자기가 뜻한 대로 되는 것 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막으실 수도 있다. 요셉처럼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난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바울에게는 유럽에서의 복음 전도를 위해 아시아로 향하는 그 길을 막게 하셨고 요나에게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다시스로 가는 배에 풍랑이 일게 하셨으며 요셉에게는 기근이 든 가나안 땅에서 가족을 애굽으로 인도하기 위해 먼저 애굽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의 삶 속엔 모두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 항상 있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길이 막힐 때가 많다. 계획한 대로 안되는 일들은 항상 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답답함을 많이 느

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은 항상 다른 길을 준비해 놓으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길에 불만을 가지기도 한다. ‘내가 생각한 대로만 되었으면 성공했을 텐데 지금 이 꼴이 뭔가?’라는 생각에 자신에 계획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을 버리지를 못한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부요해지는 길로만 인도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를 악에서 구출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누군가를 악에서 구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우리를 세우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이 사명을 위해 필요하다면 부요하게 하실 수도 있고, 또는 가난하게도 하실 수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다. 이 길에 불만을 가진다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묵상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난으로 인도하셨다면, 오늘 우리 역시도 하나님이 정하신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가신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