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고난 중에도 찬송하는 성도 - 사도행전 16장 16-34절

차작가 2023. 12. 15. 11:50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로 인해 루디아란 여인이 믿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16절부터 한 사건으로 바울이 옥에 갇히게 되고 그 일로 옥에서 간수가 구원되는 얘기가 등장한다.

두 사건은 별개처럼 보이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간 원인은 귀신 들린 여종을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줘서였다. 귀신들린 여자를 점을 치게 해서 돈을 벌던 여러 주인들이 돈을 더 이상 벌지 못하게 되자 그렇게 만들어 버린 바울과 실라를 로마 당국에 고발해서 감옥에 가두었다.

감옥에서도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자 감옥문이 열리고 묶여 있는 사슬도 풀리게 되자 이를 지켜 본 간수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물어 보게 된다. 이 때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담대히 전도하고 그리하여 그 온 집안이 주를 영접하게 된다.

귀신 들린 여종을 고치는 사건을 통해 비록 매 맞고 감옥에 갇힌 고난은 겪었지만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심으로 간수 뿐 아니라 간수의 온 집안까지도 구원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다행이지만 사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귀신 들린 여종을 그냥 두었으면 되었다. 이유도 그럴싸하다. 귀신 들린 여종이 말하는 게 복음을 방해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7절에서 처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복음을 방해하는 말처럼 보이는가?

귀신들린 여종의 말이 그럴싸해 보이지만 결코 복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18절에 바울이 심히 괴로워 했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귀신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 내 버렸다.

우리는 여기서 귀신들린 여종이 한말에서 함정을 찾아 내야 한다.

즉 구원이라는 말을 하기는 했으나 귀신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와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귀신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세상 속에서 구원이다. 세상 안에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것이 귀신이 말하는 구원이다. 사람들이 귀신들린 여종에게 와서 듣고자 하는 말이 무엇일까? 자신의 앞날에 대한 이야기고, 현재의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구원의 길이 아닐까? 그러한 여종의 입에서 나온 구원이란 말의 의미가 과연 세상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일까? 이처럼 바울은 구원이라는 말은 맞지만 구원에 담겨 있는 그 내용은 전혀 잘못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그들이 잘못된 것임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귀신의 말은 바울을 높이는 것이다. 한마디로 바울은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종의 말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을 대단한 사람으로 높이게 하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모든 마음은 하나님께 있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귀신이 바울과 실라를 높임으로 귀신을 좇아낸 것이다.

바울은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만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엇을 하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기를 소원하고 힘쓰는 사도였다. 그런데 귀신이 사람들 앞에서 여러 날을 바울 자신을 높이는 말을 했다. 그 말이 바울에게 괴로움이 된 것이다.

귀신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바울을 귀신 들린 여종을 보는 차원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귀신을 좇아낸 것이다. 사람으로부터 높임 받고자 하고 칭찬의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은 사단의 유혹이다. 사단은 우리에게 칭찬의 말로 다가온다. 칭찬의 말에 기뻐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두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신을 높이는 귀신을 좇아내는 바울처럼 스스로 높아지기를 거부하고 항상 하나님만을 마음에 두며 하나님만 높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바울과 실라가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점을 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동안 여종으로 인해서 많은 이익을 얻었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에 대해 원한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을 고소하게 되었고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히게 됐다.

옥에 갇히기 전에 매를 많이 맞았다. 그 당시의 매는 예수님을 때렸던 채찍을 말한다. 수없이 채찍을 맞으면서 살이 터지고 뭉개지는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송했다. 찬송은 감사의 노래이며 기쁨의 노래이다. 도대체 그런 상황에서 찬송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래서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을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다. 무엇에 가치를 두냐의 문제이다.

♡ 당신의 가치는? ♡

한 의사가 아프리카의 한마을에 들어가 그들을 섬기며 지냈다. 그 마을의 추장 아들은 누가 봐도 매우 훌륭한 엘리트였다.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마친 추장 아들이 마을로 돌아오자 온 마을이 술렁였다. 과연 그가 누구와 결혼하게 될지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린 것이다. 그 의사 역시 궁금한 마음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 마을에서는 남자가 청혼할 때 여자의 집에 암소를 끌고 가서 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대부분의 처녀는 암소 한 마리를 받았고 때때로 두 마리를 받았다. 가끔씩 암소 세 마리를 받는 경우도 있으나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어 그 마을 처녀 중 몇 명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추장 아들이 청혼하기 위한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그 행렬을 보니 암소를 무려 아홉 마리나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추장 아들이 도착한 집은 너무나 의외였다. 몹시 가난한 집에다가 청혼 받은 처녀 역시 병약한 외모에 영 볼품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다들 실망하여 “추장 아들이 정신이 나갔나 보다. 저런 아가씨에게 암소를 아홉 마리나 갖다 바치다니!” 하면서 수군거렸다.

그 의사는 본국으로 귀환할 때가 되어 그곳을 떠났고, 그 추장 아들과 그 처녀의 이야기도 어떻게 되었는지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 마을에 다시 방문하게 됐는데, 그때의 추장 아들이 어느덧 추장이 되어 있었다. 추장의 초대로 그 집에 방문한 의사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부인이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예전에 봤던 그 볼품없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자신감 없고 초라한 아가씨가 아닌 무척 당당하고 아름다운 데다 영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야말로 멋진 여성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그 의사가 속으로 놀라워하고 있는데, 추장이 눈치를 챘는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사실 그때 암소 한 마리면 충분히 혼인 승낙을 얻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청혼의 순간에 암소를 몇 마리나 받았느냐가 한 여인에게 있어서 평생의 자기 가치를 결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평생 자신의 가치를 암소 한두 마리 값에 한정하며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제 아내를 무척 사랑했기 때문이지요.

처음에 아내는 아홉 마리의 암소를 보고 무척 당황하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자신의 가치를 아홉 마리의 암소에 걸맞게 하기 위해 정말이지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공부를 하라거나 외모를 가꾸라는 등의 조언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한다고만 말했죠. 그런데도 아내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멋진 여성이 되어갔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여러 번이었고 살해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어려울지라도 그는 비굴하게 살지 않았다. 늘 당당했고 자신감이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자신이 영적인 암소 아홉 마리, 즉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받은 구원의 가치가 실로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늘 당당하고 자신 있는 모습으로 매 맞고 감옥에 갇히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추장의 아들이 암소 한 마리만으로도 충분히 결혼할 수 있었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존재감을 위해서 암소 아홉 마리를 끌고 가는 거룩한 낭비를 했던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써 우리가 다 그런 존재감을 갖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비록 능력 없고 얼굴이 잘생기지도 않았으며 그저 볼품없는 존재일지라도 “나는 주님이 암소 아홉 마리보다 더 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셔서 구원해 주신 놀라운 사람이다!”라는 자부심이 우리의 긍지가 되게 하신 것이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마음 깊이 담아야 한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예수를 핍박했던 바울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죽이셔도 아무 할 말 없을 텐데 그런 나를 주님의 일군으로 택하셔서 주님의 일을 맡겨주신 그 은혜가 너무 고마워 감옥에서도 찬송이 나왔을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자 땅이 흔들리고 옥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들을 매어두고 있던 차꼬도 풀렸다. 이것은 바울과 실라를 구해내기 위한 기적이 아니었다. 바울과 실라는 다음날 상관이 사람을 보내서 풀어 주라고 명령을 했다. 즉 옥문이 안 열려도 풀려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는 옥문이 열렸다고 해서 옥에서 도망을 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간수가 자살을 하려고 했다. 죄수가 도망을 친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죄수가 도망을 치면 간수가 모든 책임을 지고 죽어야 했기 때문에 죄수가 도망을 친 것으로 오해한 간수는 살 소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옥문이 열린 것은 바울과 실라를 도망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간수에게 살 소망을 잃어버린 상황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다.

간수가 자결을 하려고 할 때 바울이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라고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뛰어 들어가서 무서워 떨며 부복하고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물음을 하게 된 것이다.

간수가 바울을 보기 전까지는 살 소망이 없어서 자결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울을 보자 놀라며 구원에 대해 묻게 된 것이다. 간수 스스로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바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과 소망이 다른 데 있음을 바울을 통해서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에게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묻게 된 것이다. 즉 간수 스스로 바울에게 구원에 대해 물은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의 처지는 간수가 볼 때는 살 소망이 없는 상태였다. 매를 맞고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는 기도와 찬미를 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한 것은 살려달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찬미라는 것은 구원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노래인데, 만약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면 실제로 옥에서 빠져 나온 뒤에 찬미를 했어야 옳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미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 옥이든 어디든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간수 역시 그들의 기도와 찬미를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했을 땐 자결 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살 소망이 없는 형편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다. 간수는 그러한 바울과 실라에게서 구원을 본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가 묻게 된 것이다.

즉 당신의 삶의 소망과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라는 물음과도 같다.

만약 간수에게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상황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바울을 보면서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를 않았을 것이다. 다만 바울을 예수에 미친 사람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볼 때 간수에게는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상황이 그를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구원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결과를 두고 보면 바울이 옥에 갇히게 되는 것은 바울 개인의 사건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부르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건이었다. 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안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은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성도의 모임에 참여하는 것 까지도 개인의 문제로 여겨서는 안 된다. 만약 모든 것이 내 개인적인 문제로 끝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든 괜찮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과 삶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결코 개인적인 문제로만 볼 수 없다.

결론:

바울과 실라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힘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도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부터 믿음의 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기 때문에 보여줄 것이 전혀 없는 채 살아가고 있다.

복음에는 권세가 있다. 세상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권세가 복음에 있다. 신자가 세상을 기웃거린다면 세상은 오히려 신자의 믿음을 비웃게 것이다. 신자의 모든 삶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기회이다. 이런 기회를 헛되게 놓치지 않는 인생을 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