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말씀을 대할 때 필요한 자세 -사도행전 7장 10-15절

차작가 2023. 12. 15. 11:52

11절에 보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말한다. 성경에 대한 베뢰아 사람의 태도에 대해 말하는 내용이다. 대개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말할 때 이 본문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본문은 베뢰아 사람들이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했으니까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라는 교훈을 주는 것 보다는 오히려 오늘 설교 제목처럼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가를 말해 주고 있다.

11절의 너그럽다(신사적이다- noble)의 뜻: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다. (우리말로 번역이 어렵다. 예전 번역은 신사답다로 지금 번역은 너그럽다로 번역되었다) 이 말은 성경의 모든 것을 검토하고 선생들의 말을 부지런히 듣는 사람을 말한다. (제 번역은 신중하다로 하고 싶다) 그리스 철학자들도 주의 깊게 듣는 사람을 좋아했다.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베레아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서 말씀을 대하는 세 가지 태도를 살펴보자.

1) 가르침에 대해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바울을 대했는데 베레아 사람들은 성경을 기준으로 판단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의 회당에서 성경의 뜻을 풀어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친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쫓기게 됐다. 형제들의 도움으로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오게 된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가르쳤다. 이것을 보면 11절에서 베뢰아 사람과 데살로니가 사람으로 구분하여 말한 것은, 베뢰아와 데살로니가 원주민을 일컬어 말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거하는 유대인을 일컬어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베뢰아 사람은 베뢰아에 거하는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고, 데살로니가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거하는 유대인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결국 베뢰아 사람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공부했음을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같은 유대인이지만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각기 달랐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베뢰아의의 유대인의 회당에서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했던 말을 했을 것이다. 즉 성경을 풀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베뢰아의 유대인들에게도 지금까지 알아오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일 수가 있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여 바울을 붙잡으려고 (50마일 떨어진 곳까지)쫓아 다녔다. 바울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배워왔고 또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작정 바울이 틀렸다고 나섰다. 이런 면에서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바울을 자신들의 관습이나 상식, 또는 편견을 버리고 객관적인 자세를 가지고 바울의 말이 과연 그러한지 성경을 상고했다. 이것을 가지고 너그럽다(제 번역처럼 신중하다)라고 표현했다.

신자에게 있어서 무서운 것은 편견, 또는 관습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옳다고 믿을 때 다른 말에 대해서는 아예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이 때로는 분란과 분리를 가져오기도 하고 진리를 밀쳐내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베뢰아 유대인들의 태도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대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편견과 관습을 버리고 과연 그러한지 열린 마음으로 스스로 말씀을 상고하며 깊이 살피는 태도야 말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신자가 열린 마음으로 스스로 성경을 상고하며 살피지 않는다면 분위기와 인간에게 끌려가게 되기 쉽다. 저 사람의 말을 들으면 맞는 것 같고, 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것도 맞는 것 같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2) 간절한 마음(with great eagerness)으로 성경을 대했다.

성경에 대해 배우려는 열망이 가득했다.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열심을 의미한다. 바른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런 마음 때문에 사도 바울의 말에 대해 자기들의 편견보다는 과연 그러한지 살피는 쪽을 택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사상을 지키고 고집하는 것보다는 바른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심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여러분께 있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말씀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다. 바른 말씀을 배우고 따르기를 원하는 열심이다.

마틴루터 일화를 보면 그가 1503년 20살 나이에 에루프르트 대학교 2학년생 일 때, 대학 도서관에서 성경을 발견했다고 되어있다. 태어나서 처음 본 성경전서였으니 그 셀렘이 컸을 것이다. 그는 성경에 교회 예배용 본문보다 훨씬 많은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한 줄기 새로운 빛이 그의 정신에서 번득였다. 종교개혁은 바로 그 발견에서 태동했다.

이렇게 말씀에 대한 간절한 마음과 열심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살피고 상고하도록 하게 한다.

3) 날마다 성경을 검토했다.

바울이 말한 내용이 성경에 그대로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성경을 날마다 검토했다.

날마다라는 말에는 부지런히, 쉬지 않고, 진지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라는 뜻이 담겨 있다. 사람이 마음에 없는 일을 한다면 날마다라는 사실은 있기 어렵다.

베레아인들은 이렇게 진정 마음으로 목표를 가지고(과연 그런가 하여) 말씀을 묵상했다.

13절에 보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에까지 와서 소동을 벌였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베뢰아의 유대인들이 거기에 동조를 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성경을 상고함으로 인해서 바울의 가르친 바가 옳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성경을 잘 연구하라고 하셨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유대인들이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나?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한 것이라면 성경이 증거하는 영생의 길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세 조차도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였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세는 예수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모세가 자신에 대해서 기록하였다고 말씀하는 것일까?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가 누구신가'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인간의 반응, 이러한 사건들 하나 하나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처럼 희망 없는 인간에게 빛으로 유일한 희망으로 오셨음을 성경이 증거하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한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 곧 어둠이다. 빛이 왔으되 빛을 모르는 것이다. 요 1: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말씀한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성경을 보십니까? 혹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신자가 아닐 것 같아서 '나는 신자다'라는 자기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아닐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는 모습이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이고 자기 영광을 취하는 행동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읽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왜 예수님만이 나 자신에게 유일한 희망일 수밖에 없는지, 왜 예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인가를 깨닫는 것이 제대로 성경을 보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자기들의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에게 나오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이 없이도 자신들이 찾아낸 방법을 통해서 영생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잘 연구 안 한 결과 =>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16: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16: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16: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16: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16: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16: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16: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성경을 믿지 못하면 눈 앞에 보이는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한다.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결과이다. 그래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할 필요가 있다.

바울의 성경에 대한 지침

딤후 3:16-17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결론:

베레아 사람들은 딤후 3:17말씀에 대한 증거다. (14,15절에 나옴. 소동에 동요하지 않고 핍박 받을 각오하고(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의 행태-야손의 집) 바울을 배로 옮겨 아덴까지 피신하도록 한다) 베레아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자세를 보여 준 것을 생각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균형 잡힌 마음과 자세를 가져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고 그로 인해 풍성한 삶이 되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