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목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확신이 없는 성도들에게 확신을 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생활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도입:
요즘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더 그런 것 같다. 인공지능 발달로 인간이 하고 있는 대부분의 일들을 앞으로 로봇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 또 가장 가까이는 북한 핵의 위협도 느끼고 있어서 혹시 우려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을 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딜 둘러봐도 확실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이 느껴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그 해결점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문:
지난 시간 하나님은 2차 전도 여행 중에 아시아 쪽으로 전도를 막고 유럽 쪽으로 인도하셨다.
11절: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중간 섬)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바로 다음 날 네압볼리로 갔다. 20:6 절에 보면 5일 걸린다고 나온다. (120마일)
바로 순종하는 사도들 (바울, 디모데, 누가)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면 자신의 생각을 빨리 접고 바로 순종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12절: 거기서 빌립보(네압볼리에서 10마일 정도로 떨어진 곳)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 일을 유하다가
9절의 천사의 말을 듣고 왔는데 일은 커녕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급하게 부르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마게도냐에 도착한지 수일이 지나도록 그 천사는 나타나지도 않고 그냥 며칠을 아무 일 없이 보내게 되었다. 이럴 때 드는 한 가지 생각은 우리가 잘못 봤나? 잘못 들은 것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그리고 실망하게 된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렇지 않고 기다렸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 까지 기다렸다. 신앙생활하면서 주로 실망하고 좌절하는 이유가 우리 생각대로 안될 때다. 두 번씩이나 갈 길이 막힌 사도들은 마게도냐에 와서 어떻게 보면 좌절을 경험할 수도 있다. 처음 와 본 지역이라 더 불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다.
우리의 생각대로 안될 때 우리는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 정말 이번만은 될 줄 알았는데 정작 안 될 때라도 좌절할 필요 없다. 왜냐면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그분의 뜻대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일을 인내하면서 안식일까지 기다렸더니 일이 생기게 된다. 13절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안식일에 보통 회당에 갔는데 빌립보 지역은 회당이 없을 정도로 유대인들이 드문 곳이었다. 보통 유대인 성인 남자 10명만 되어도 회당으로 모여야 한다고 한다. 빌립보 지역에 회당이 없었다는 것은 유대인 남자 10명도 없을 정도로 유대인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기도할 처소인 강가로 나갔는데 남자들은 없고 오직 여자들만 나와있었다. 그 여자들은 왜 나와있었을까? 그들도 회당이 없어 예배드리러 나왔던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14절의 루디아라는 여인이 어떤 여인인가를 보면 알 수 있다. 14절에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고 소개한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는 예배한다는 의미이다. 즉, 루디아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여인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고 거기에 모인 여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개종한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다.
여인들을 만난 것은 사도들이 예상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남자들만 만나 온 터라 적잖이 당황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때로는 실망스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면 결코 실망할 필요는 없다. 사도들은 이렇게 모인 여인들에게 정성껏 온 힘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 중에 루디아라는 여자가 그 말을 듣고 있을 때 14절 처럼 주님이 그의 마음을 열어 바울이 전한 메시지에 반응을 하게 되었다.
사도들이 만약에 여자들이라고 실망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루디아는 아마도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할 때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영혼이 주께 돌아오는 구원의 과정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예수를 알고 영접하기 위해 맨 먼저 필요한 게 무엇인가? 들어야 한다.
루디아가 사도들이 전한 말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우리도 생각해 보면 누군가(부모, 친구 등)가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듣고 예수를 영접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반드시 듣게 하는 일 즉, 복음을 전하는 일이 먼저라는 것이다.
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보통 보면 예수를 믿겠다고 혼자 자발적으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언젠가 한 번은 예수에 대해 들어봤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생기면 예수께 나오게 된다.
복음을 듣지 않고는 절대로 회심하지 못한다.
마 13: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살전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잠 15:31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
루디아는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예수를 영접했다.
사도들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예수를 알 수도 영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를 알 수 있는 일은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불신자들이 듣든 안 듣든지 상관없이 전하면 된다. 물론 예의는 갖추고. 또한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정기적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과정 두 번째는 하나님이 그 마음을 열어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할 때 애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부담스럽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떻게 해 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예수를 영접하고 안 하고는 우리의 노력과 설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복음 전파의 도구라는 것이다. 구원의 시작과 완성은 하나님이 하시고 우리는 그 과정을 돕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한 영혼이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신다.
루디아는 자색 옷감 장사였다. 귀족들이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자색 옷을 주로 입었는데 루디아는 그런 귀족들을 상대로 장사한 사람으로 보인다. 돈도 많이 번 것 같다. 15절에 보면 그 집안 식구도 (노예를 포함해서) 꽤 있는 것으로 보아 부자 였음이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녀에겐 채워질 수 없는 무언가 있어서 유대교로 개종했을 것이고 정기적인 예배를 드린 것 같다. 아직도 채울 수 없는 그녀에게 사도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부활에 대한 복음을 듣고 영적인 문제가 드디어 해결된 것 처럼 보인다.
우리 주위에도 이런 유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 겉으론 행복해 보여도 영적으로 굶주리고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 사도들도 전혀 몰랐다. 그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배 타고 바다를 건너고 강가에 기도하러 나갔을 뿐이다. 근데 하나님은 루디아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사도들을 아시아로 보내시지 않고 환상을 보여 주며 마게도냐로 오게 하시고 여인들을 만나게 하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사도들은 이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그저 순종했을 뿐이었는데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도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해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이다.
렘 9:24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기뻐하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얼마나 기뻐하실까?
루디아를 통해 집안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된다.
루디아가 예수를 믿고서 온 집안이 세례를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평소에 루디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녀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언행일치의 삶을 보여 준 것 같다. 조용히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세상을 따라 살지 않은 것 같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온 집안 식구들이 루디아가 믿는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에 우리의 행동이 그래서 중요하다. 당신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고 싶다는 고백이 나올 정도가 되어야 한다.
루디아가 사도들을 집으로 초청해서 섬기다.
15절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이 말은 “내게 믿음이 있는 증거로 본다면”의 뜻이다. 즉, 당신들이 내가 진짜 예수를 믿었다고 확신한다면 이란 뜻이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그 믿음의 증거가 나타나는데 바로 남을 섬기는 것이다. 당시 사도들의 처지는 불쌍했다. 적당한 거처도 없고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막 6: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대로 수중에는 돈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도들을 긍휼이 여겨 자신의 집을 오픈해서 섬기는 이 자세는 분명 거듭난 사람의 모습이다. 우리 안에 예수가 자리하고 있다면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이웃들을 잘 섬겨야 할 것이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당신의 지갑이 회개하기 전까지 당신은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운동경기도 앉아서 보기만 하는 것 보다 자신이 직접 뛰는 것이 훨씬 즐겁고 기술도 늘고 건강에도 좋다. 믿음 생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믿기만 하고 지켜 보기만 하면 성장이 더디거나 아예 있는 것도 메말라 버릴 수도 있다. 비록 온전치 못하고 잘 하지는 못해도 내가 들은 복음대로 따라 뛸 때 놀라운 새로움과 담력과 즐거움을 누리 수 있게 된다.
결론:
하나님은 루디아를 사도들이 만나도록 하기 위하여 마게도니야 환상을 보여 주셨다. 사도들은 마게도니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갔다. 하나님은 사도들을 복음 전하는 자로 사용하기를 원하셨고 순종한 사도들을 통해 루디아의 마음을 열게 하셔서 그 자신과 온 집안이 구원 받게 하셨다.
사도들은 영문도 모른 채 아시아를 뒤에 두고 유럽 지역으로 떠났지만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할 게 없다.
모든 게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에서도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을 대할 때 필요한 자세 -사도행전 7장 10-15절 (1) | 2023.12.15 |
---|---|
고난 중에도 찬송하는 성도 - 사도행전 16장 16-34절 (0) | 2023.12.15 |
내 뜻대로 안될 때 - 사도행전 16장 6-10절 (0) | 2023.12.15 |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받음 - 사도행전 15장 1-11절 (0) | 2023.12.14 |
복음이 필요한 이유 - 사도행전 14장 8-18절 (1) | 2023.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