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뢰아의 유대인의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가르쳤던 사도 바울은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사도 바울을 붙잡고자 하는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을 피하여 아덴으로 가게 된다. 아덴은 고대 헬라의 대표적인 도시 국가로서 오늘날 아테네를 말한다.
바울의 자세를 보라 (격분하고 변론하는 자세에서 복음을 향한 열정을 볼 수 있다)
6절 17: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고대 유적 도시인 아테네에서 보통 사람들은 유적들을 보고 놀라는데 바울은 우상으로 가득한 것을 보면서 마음에 격분이 일어났다.
우상은 일단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고 인간의 마음과 이성을 영적인 소경으로 만들며 사탄의 종 노릇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상이란?
헬라어로 우상은 ‘비실재’(非實在)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철학자 플라톤은 영원불변의 실재에 대한 반의어로서 환상과 같은 이 세상을 나타내는데 이 말을 사용했다. 예언자들이 말한 이교의 우상은 유일하고도 참된 하나님에 대해서 비현실적인 거짓 신을 뜻한다.
우상은 인간의 심중 내면에서 일어나는 열정의 목표물이 표상된 것이다. 즉 재산, 권력, 명예 등을 갖고 싶어 하는 열망과 충동이 표출되어 나타난 것이 우상이다.
우상이란 곧 하나님 대신으로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가장 귀한 애정을 빼앗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보다 자기의 아내나 자녀 혹은 명성이나 사업을 첫째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그의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상 숭배의 본질은 손에 넣으려는 욕망이다. 사람은 신으로부터 무엇을 얻기를 원하여 우상을 만들고 이것을 예배한다. 심지어 사람은 희생과 봉헌물과 예배에 의하여 자기가 원하고 있는 것을 얻기 위해 신을 설득하고 매수할 수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C.F.D. 몰은 “우상 숭배란 자기를 신에게 봉사로 드리려는 것보다 자기 목적 때문에 신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상 숭배의 본질은 보다 많이 가지고자 원하는 욕망이다. 따라서 무엇을 얻으려는 욕망에 자신의 전 생활을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설자리에 물질을 놓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신이 아니라 물질을 예배하는 것이며 이것이 우상숭배이다.
불황시대 역술인 100만 시대 - 역술인 협회 백운산 회장은 "미래를 두려워하거나 기대하는 사람 심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 없어지지 않을 직업"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우상이 두려웠으면 알지 못하는 신에게 하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23) 이처럼 알지 못하는 신까지 새긴 단이 있는 것은 혹시 자신들이 알지 못한 신의 저주를 받을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을 바울은 종교성으로 보며 아덴이 이러한 종교성이 많음을 책망했다.
바울이 변론하다
바울이 만난 사람들 (17절에서)
1) 유대인 (종교인에 대해서): 종교적이지만 그리스도에 대해서 맹인인 사람들
2) 경건한 사람들: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유대교로 개종하기도 함. 이유는 하나님의 율법이 도덕과 정의를 추구함.
3) 장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들 빼고.
내면의 성장 보단 외모 중심에 빠진 사람. (진리를 모르고 삶에 만족이 없으면 외모 가꾸는데 집중하게 됨) 소유 중심. 명예 중심 => 소위 물질주의.
또한 철학자들을 만나게 됨.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사고와 이성과 생각을 동원하여 진리를 발견하고 신을 밝혀내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4) 에피쿠로스 철학자들 (Pleasure seeker 쾌락 추구)
세상은 우연히 만들어짐
신이 인간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인생의 기쁨을 발견하는 게 사람이 사는 목적이다
철학을 행복 추구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행복이란 일종의 정신적 쾌락으로, 그것을 구하며 그것을 얻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단순히 그때그때의 일시 쾌락으로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 어떤 때에도 마음이 '어지럽혀지지 않은 상태'를 쾌(快)로 보았다. 공(公)의 생활을 단념하라, 숨어서 조용히 살라고 권하고 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삶을 채우고 만족시킬 것을 갈망하고 빈곤하고 불만스러워합니다.
5) 스토아 철학자
만유신론 , 운명론
이런 사람들을 22절에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고 결론. => (제럴드 메일러는 심리학자의 20년간의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인간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태생적 욕구가 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답변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 했다. (24절):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심
만물을 지으신 분이다. : 우상들은 피조물들임. 따라서, 하나님은 우상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태양을 우상으로 섬겨도 하나님은 그 태양을 지으신 분이시다.
천지의 주재: Lord of heaven and earth. (천지의 주인. 왕이시기 때문에 어떤 피조물도 모두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다. 심지어 사탄도.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아덴 사람들은 신을 모시기 위해 많은 신전을 지었다. 우상들은 건물 안에 갇혀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건물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신학적 용어로 무소부재하신다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음을 의미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신다. 1:1절은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로 시작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존재나 모든 일들이 피조물 스스로 이루어 가는 것은 없음을 전제한다.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한 것이 없다.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다.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이다. 혼돈과 공허를 하나님이 실패한 첫 창조를 심판해 버리신 상태로 말하는 것이다. 심판의 땅이 되었기 때문에 혼돈하고, 모든 것을 파멸시켰기 때문에 공허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혼돈과 공허는 하나님이 만드신 땅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혼돈과 공허의 땅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하나하나 채워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었기 때문에 창조의 날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혼돈과 공허의 땅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채워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시고 칠일 째에 안식하셨다.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 우상은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서 섬김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족한 분이 아니시므로 사람의 손길(도움)이 필요 없다.
아덴 사람들은 신의 기쁨을 위해서는 인간의 희생과 섬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희생과 섬김을 신 앞에 음식을 바치고 신이라 부르는 형상을 치장을 하고,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은 무엇에도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기에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는 분임을 말했다.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인간의 도움 없이 하나님 스스로 얻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으로 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 역시 아덴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 우상은 주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다.
26-27절에 보면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17: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인류는 아담을 통해서 난 한 혈통이기에 아담 이래로 모두 죄인일 수밖에 없으며 연수도 하나님이 정하시고 우리의 거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의해서 된 일임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임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신의 간섭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아덴 사람들에게는 신에게 간섭받는 것이 없었다. 다만 신을 섬겨주면 그 대가로 복을 누리는 것만 있다. 이것이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28-29절에 보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신의 소생이라고 말하면서 신을 금, 은, 돌에 새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신을 금, 은, 돌에 새기는 것은 그것들을 신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신의 소생이라고 할 때 결국 금과 은과 돌의 소생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논리릍 통해 금과 은과 돌에 신을 새기는 것이 인간 스스로 오류를 범하는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신다. 따라서 말씀 앞에서 잘못되어진 것이 있을 때 언제나 수정하고 바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곧 진심으로 성경을 높이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성경의 권위를 말하면서도 결국 보면 자신의 생각과 사고를 성경 위에 두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든 자신의 생각이 옳으며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내 마음에 들면 믿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식이다. 우리가 종종 이런 오류를 가지고 살아갈 때가 있다.
신자가 말씀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하나이다.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아무 염려 없이 편히 살면 그것을 최고의 복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말씀을 통해서 알고 싶어지는 것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길 바란다. 그럴 때 말씀은 여러분에게 빛으로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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