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목적:
아볼로가 고린도로 가게 된 배경. 학식 있고 수사학에 능했던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다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의해서 하나님의 도 즉, 예수의 세례(성령세례)에 대해 알고 더 힘을 얻어 고린도 지역으로 가게 된 것을 이야기 함으로 성도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얼마가 중요한가를 알게 한다. (아볼로의 신앙의 모습을 통해서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살펴보자)
1. 2차 전도여행 끝나고 2차 전도여행 시작:
지난 시간 고린도 교회 사역을 1년 반 동안 마치고 바울은 겐그레아와 에베소를 거쳐 안디옥으로 와서 2차 전도 여행(49년에서 52년)을 마치고 다시 3차 전도여행(53년에서 58년)을 시작한다. 2차 전도여행 시 들렸던 곳을 주로 지나는데 갈라디아를 거쳐 오늘 본문에 에베소에 다시 오게 된다.
2. 아볼로를 만남.
아볼로의 모습을 통해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살펴 보고자 한다.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1) 알렉산드리아 출신: 알렉산더 대왕이 애굽을 페르시아로부터 빼앗을 것을 기념으로 나일강 삼각주 서쪽에 새운 로마 3대 도시 중의 하나. 당시에 약 100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 성경의 본산이기도 하다. 아볼로는 여기에서 헬라 철학을 연구해서 당시 철학자 필로를 대적할 정도의 학자였다.
2) 언변이 좋았다. Eloquent, learned, formally skilled in rhetoric (수사학에 정통함)
고린도교회 아볼로를 추종하는 세력이 생길 정도로 웅변과 설교를 잘했다. 하나님이 그런 재능을 주신 것이다.
3) 성경에 정통했다. (아볼로는 헬라 철학과 유대교 유일신 신앙에 뿌리가 깊은 사람이었다)
18: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1) 일찍이=> 조기 교육.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 교육을 받은 것 같다.
2) 주의 도: 율법에 관한 것
3)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열심으로(영이 불을 품는다) = He was burning with a holy fire to proclaim the glorious promise that Jesus is the promised Messiah, the Lamb of God. (참된 신앙인의 첫 번째 모습은 열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어 보실 것 같다. 한 번이라도 복음을 위해서 뜨거운 적이 있었냐고. 참된 신앙인은 자기가 경험한 예수님 때문에 그 안에 반드시 뜨거운 열정이 있을 수 밖에 없다.
4)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성경관이 약했던 사람이었다.
세례 요한의 가르침: 회개해야 한다. 메시아가 올 것이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다. 아볼로 역시 요한처럼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알지 못했고 성령세례를 경험하지 못했다. =>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성경관이 약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는 것만큼 확실하게 헌신했고 진실되게 하나님을 찾았다. (히 11:6 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에베소에 온 이유도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러고는 고린도로 가고 다시 에베소로 돌아 온다. 그리고 크레데를 방문한다.
그럼에도 회당에서 담대히 말했다. 이것을 보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그들의 집을 초청해서 하나님의 도 즉,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섭리에 대해 정확히 풀어 설명해 준다.
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사람에게는 낮아지기보다는 높아지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때문에 누구 앞에서든 낮아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보다 더 높아지려고 한다. 사람이 모였을 때 자랑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내가 너보다 더 좋은 것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려고 한다. 결국 서로가 자랑을 하는 것은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이러한 속성 때문에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우리 자신의 경우를 두고 생각해 봐야 한다. 여러분이라면 누군가가 여러분을 가르치고자 할 때 고마운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더군다나 여러분 스스로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고, 또 상대방이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참 쉽지 않은 문제이다.
26절에 보면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그대로 풀이하면 아볼로가 회당에서 주의 도를 가르칠 때 그것을 듣고 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가 복음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에 대해 더 자세히 풀어서 가르쳤다는 뜻이다.
만약 여러분이 아볼로의 입장에 있다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행동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만약 자존심과 체면이 살아있는 상태라면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순전히 복음만을 생각하고, 복음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복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므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면 반발과 충돌만 있을 것이다. ‘나도 알만큼은 안다’는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게 할 것이고, 더군다나 ‘나는 목사다’라는 생각이 살아있다면 반발은 더욱 더 거셀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볼로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를 말한다. 이것은 아볼로가 그리스도로 세례 받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음을 뜻한다. 즉 그리스도를 알고 가르치기는 하였으나 자신 스스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하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회당에서의 아볼로의 가르침이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중심으로 한 것이기 보다는 단지 배워서 알고 있던 인간의 지식을 중심으로 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는 복음에 대해 무지한 것으로 들려졌던 것이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교회 안에는 스승으로 정해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목사는 무조건 스승이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 목사가 설교하는 것은 목사가 깨달은 복음을 여러분께 소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스승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깨달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며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사는 그분이 곧 우리의 스승이다. 때로는 목사의 설교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만으로 살아가는 귀한 삶 앞에서는 부끄러워 질 수밖에 없다. 목사의 몇 십 분의 설교보다는 여러분의 곁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형제의 삶이 더 큰 가르침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안다는 생각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은 알되 그리스도는 모르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머리는 주님을 받아들이되 내 삶은 주님을 거부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우리에게 누가 스승일까? 모든 삶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그리스도로 사는 그분이 스승이 아닐까? 우리가 이러한 생각으로 모일 때 진정한 교회로 세워질 수 있다.
27-28절을 보면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고 말한다. 이것을 보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 가르침을 받은 아볼로는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거하여 유대인의 말을 이겼음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아볼로가 앞서 말한 것처럼 초대교회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된 것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가르침 때문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신자는 자존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항상 쓸데없는 싸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심지어는 신앙을 가지고도 싸우게 된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은 것을 말할 때 그것을 시기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가르치시고 유익된 자로 만드시고 도움을 주기 위해 형제를 여러분 곁에 두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가르침을 받게 하실 수도 있다. 이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무슨 가치 있는 사람이겠는가? 죽어야 할 죄인이 예수님 때문에 살아있는 것 아닌가? 그런 우리가 목사라고 해서 달라질 것 없고 장로라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이 세우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누가 더 잘하는가?’라는 싸움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차이는 누가 그리스도로 사느냐에 있다. 우리가 가진 성경 지식도 그리스도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모두 쓸데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성경은 전혀 모른다 할지라도 예수님 한 분으로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는 시골구석의 할머니가 우리의 스승일 것이다.
이런 마음이라면 누구에게서든, 설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가르침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주고 깨닫게 해주는 분이라면 그분이 곧 나의 스승이라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겸손이며, 그러한 신자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유익된 존재로 남게 되는 것이다.
성경 지식을 가르친다고 해서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부터 항상 그리스도 앞에서 낮아진 자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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