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예수가 인생의 전부였던 바울 (사도행전 마지막 편) - 사도행전 20장 17-27절

차작가 2023. 12. 15. 12:00

우리는 사도 바울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신자에게서 보여야 할 당연한 모습이 보였을 뿐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대단하게 보인다면 그만큼 우리가 믿음에서 멀어진 채 살았음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믿음에서 멀어진 채 살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대단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분들의 믿음의 삶을 대하면서 그분들이 대단하고 위대하다고 높이기보다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발견하고 애통해 하는 심정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그분들은 믿음으로 살았던 그 모습들이 오늘 동일한 믿음을 말하는 우리들에게서는 왜 보이지 않을까?

과연 왜 그럴까? 사도들이 하나님을 믿었던 그 믿음과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믿음은 동일한 믿음이다. 질적으로 차이가 전혀 없는 믿음이다. 그런데 왜 사도들에게서는 증거 되고 있는 믿음의 모습들이 우리들에게서는 희미하다 못해 아예 안 보일까?

사도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동일한 것이라면 사도들의 삶을 대단하다고 하면서 오늘날 우리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즉 사도니까 그럴 수 있지만 우리는 사도가 아니니까 사도의 삶을 단지 칭송하고 높여주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도들의 삶은 믿음으로 행한 것이다. 믿음의 열매이고 믿음의 능력이다. 그런데 동일한 믿음을 말하는 우리에게서는 그와 같은 모습이 증거 되지 않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

바울은 의지력이 있고 실천력이 있는 반면에 우리는 의지가 약해서 그럴까? 하지만 믿음은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결국 의지와는 상관없는 문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반성과 뉘우치는 것을 참 잘한다. 어떤 글을 보면서 자신의 잘못됨과 부족함을 보게 될 때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경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못났구나’라는 것을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생각을 가진다는 것 자체는 귀하다. 그런 생각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이 잠시 동안의 생각으로 끝나버린다면 과연 열매는 무엇일까? 결국 우리의 문제는 잠시 동안의 생각에 머물러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만 하지 말고 실천을 하자는 말을 드리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생각은 하되 귀한 것은 따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보물은 따로 가지고 있으면서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 곧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사도 바울을 보면서 ‘그래 바울처럼 살아야 하는데 부끄럽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정작 보물은 남들처럼 잘 사는 것이라면 생각은 잠시 동안의 상념으로 머물다 사라져 버리고 몸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달려가지 않겠는가?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보물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정확히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심으로 보물 다운 것을 보물로 여기며 그 보물에 나의 모든 마음을 두고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에게서도 사도 바울과 같은 모습이 보일 것이라고 믿는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오순절이 이르기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에베소에 들르지 않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오순절이 이르기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에베소에서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굳이 오순절이 이르기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고자 한 것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모금한 연보를 전해주는 일이 급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 연보는 단순히 어려운 교인을 돕는 구제가 아니라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의미의 연보였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오순절에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에베소를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하여 불러서 뭔가 부탁을 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일했던가를 말하면서 그것을 기억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일할 것을 장로들에게 부탁을 한다. 그리고 이 부탁은 오늘 우리에게 하는 부탁이다.

바울은 먼저 장로들에게 자신이 에베소에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일했던가를 말한다. 19-21절을 보면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 한 것이라"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증거한 것은 오직 믿음이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믿음에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꺼림이 없이 전하여 가르쳤다는 것이다.

바울의 개인 입장이나 사정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는가만 생각하며 전한 것이 사도 바울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보물은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가장 귀한 보물이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울의 전부였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울의 전부였다. 유대인의 간계로 인하여 당한 시험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라는 보물이 사도 바울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도 말한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2-24절)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갔을 때 어떤 일을 당할지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유대인들로 인해서 핍박과 환난을 받았기에 유대인들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에 복음을 가지고 갔을 때 결박과 환난이 기다릴 것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나의 심령은 이미 매임을 받았다고 말한다. 즉 결박과 환난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바울의 심령은 무엇엔가 단단히 붙들렸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였다.

바울에게는 이미 자기 생명보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더 귀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자기 생명보다 귀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에 주저하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이런 바울에 비해 우리는 어떻나? 나의 생명이 귀하나? 예수 그리스도가 귀하나? 우리는 예수를 말하되 예수님을 보물로 여기지 않고 살아간다. 귀한 것을 온통 세상에 두고 있다. 그러니 예수를 말하면서도 생각은 하면서도 마음은 세상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는 것 사이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여기는 것은, 사망에 처한 악한 자신을 구출할 분은 예수님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율법도, 가문도, 세상의 그 어떤 조건도 자신을 악에서 구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다. 오히려 그러한 세상의 조건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게 하고 핍박하게 했음을 알았기에 배설물로 여겼던 것이다.

 

이제 인간의 본질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악에서 헤어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아무리 윤리와 도덕으로 자신을 감싼다고 해도 결국 위선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파헤쳐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나 자신에게는 도저히 구원의 힘이 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철저한 절망에 빠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길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 된 나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보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살기를 소원하고 힘쓰게 되는 것이다.

신앙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가장 귀한 분으로 모시고 살아가게 될 때 여러분에게서도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의 흔적이 보이게 된다.

예수님과 더불어 산다면 필히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향을 받으며 살게 되어 있다. 예수님을 말하되 예수님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것이 전혀 없다면 분명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을 말한다고 해서 신앙이 아니다.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신앙이 아니다. 말이 말로 끝난다면 그것은 신앙을 위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 과연 그 사람에게서는 어떤 모습이 보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이 인생의 보물이며 전부인 그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다. 부러울 것도 없다. 우리가 신자로서 이러한 삶을 소망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세상을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돈으로 사는 인생은 기껏해야 몇 십 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사는 인생은 영원하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이 귀한 보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오늘 이 시간에 우리를 향한 바울의 증거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잠시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로서 예수님을 입술로 고백하게 되고 여러분을 삶 속에 담아내는 신앙생활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