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 - 사도행전 19장 1-7절

차작가 2023. 12. 15. 11:59

설교 목적:

요한의 세례(죄에 대한 회개)에만 머물러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십자가와 부활을 체험)에 이르도록 권면하고 방언과 예언은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증거하는 성령의 특수 사역임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본론:

바울이 2차전도 때 에베소를 떠나면서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돌아 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아볼로와 바울은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위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어떤 제자들은 누구인가? 예수를 모르는 제자들을 말한다. . 3절에서 보면 요한의 세례만 안 요한의 제자들이 있다. 7절에서 보면 12명이었다.

에베소 교회와 상관없이 그저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말한다. 예수를 안다고 하면서 교회와 떨어져 지낼 수는 없는 법이다.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무엇을 믿을 때? , 제자가 되었을 때, 혹은 세례를 받았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이 답변을 볼 때 진짜 믿음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제자라고 하는데 막상 대화해 보니 뭔가 부족하고 완전하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너희들이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어 본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이 중요하다. 성령의 증거가 없으면 중생의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믿을 때 성령을 받아야 정상이라는 뜻이다. 구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의 궁극적인 의미라는 진리를 믿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 그런 참된 믿음이 있을 때만 성령을 받을 수 있다.

믿을 때 성령 받는 다는 의미는?

이렇게 솔직해야 한다. 그래야 답을 얻고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누군가 성령 받으셨나요? 혹은 성령체험을 하셨나요?라고 묻는다면 정직하게 답을 할 필요가 있다. 없다면 없다고 말해야지 그런 척하면 안 된다.

 

19: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이 질문(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너무 중요하다. 이 질문이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렇게 질문한 것은 그들의 삶 속에 성령의 증거가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을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받아야 한다.

요한의 세례만 안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 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약속된 메시아가 오기를 기대하며 받는 회개의 세례)만 알고 예수의 세례(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승리의 부활 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를 믿고 받는 세례)를 모른 채 살아 갈 수 있다.

죄에 대한 회개만 있었지 실제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완성의 단계인 예수를 모른다.

사람이 회개도 하고 세례도 받지만 예수를 영접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을 고백할 수는 있지만 성령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실제로 눈에 보이게 된다. 열매로 드러나지 않고 예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삶을 살 수도 있다.

믿음이 완성되지 않을 수 있다. 이 12사람들은 요한이 외친 메시아를 믿었다. 심지어는 회개도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없는 즉 그들의 삶에 성령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영적으로 말하면 껍데기만 믿는 사람이었다.

(그들의 대답으로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다양한 신념의 혼합물을 삼킨 혼합 주의자임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들이 세례 요한의 제자라고 생각했지만 요한의 가르침과 더 이상 연계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가장 높으신 분의 선지자"인 요한의 메시지를 놓쳤다. 그는 "길을 예비하기 위해 주님 앞에 나아갈"운명이었다 (누가 복음 1:76). 그들이 요한의 메시지를 간직했다면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았을 것이다.)

 

4절을 보면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어떤 의미의 세례인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요한의 세례란 요한의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가르치는 세례라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다. 회개의 세례라는 것은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서 받는 세례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으로 자신의 죄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으로 구원 문제는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요한의 세례만 아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말을 들어볼 때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령 세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살게 하기 때문이다.

 

요한의 세례는 세례 받은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바라보고 살아야 할 대상이 없다. 아볼로가 주의 도를 배워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고는 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아는 수준에서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 가르치는 것으로 끝난다. 아볼로의 마음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요한의 세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요한의 세례는 단지 예수님을 믿게 하는 도구요 과정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단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차원이며, 우리가 죄인임을 알았을 때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믿는 것이 진정한 세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이 오심으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성령 세례라고 하는 것이다.

마 3:11-12절에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 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는 말씀에서도 보면 요한은 자신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를 질적으로 다름을 말한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결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을 오늘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야 한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 자신들이 성령세례가 아닌 요한의 세례만 아는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되고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회개하는 것에 더 나아가서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세례 자체가 곧 구원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죄를 용서해달라고 말한다. 또 내 스스로도 내가 죄인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겨우 요한의 세례를 알고 있는 수준이 된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성령과 불로 세례 받은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앎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나의 전부임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만으로 살아가는 신자로 만들기 위해 성령이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은 죄를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며 예수님처럼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힘쓰게 된다. 이것이 자신을 보지 않고 예수님을 보고 사는 신자이다. 자기보다는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과 봉사를 보고 살기 때문에 나 역시 예수님을 전하고 증거하기 위해 예수님을 본받아 살기를 힘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예수님보다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기도할 때 죄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것으로 자신이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며 요한의 세례에 머물고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 본문이 가르치는 말씀이다.

요한의 세례는 다만 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실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버리신 현장이다. 즉 개인적으로는 손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십자가이다. 따라서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사람으로서는 회개는 할지언정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에서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19: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다는 의미는?

요한의 세례 즉, 회개의 완성은 어디에서 이뤄질까? 그것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죄를 노출 시키고 하나님의 은밀한 장소이므로 십자가에서 자기의 죄를 완전히 노출시켜 죽은 죄인임을 깨닫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절대 죄 용서함을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것이 예수의 세례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행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성령의 내주 여부를 방언과 예언으로 할 수 없다. 사도행전에 본문 포함해서 3번의 방언과 예언의 역사가 있었는데 모두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증인 됨이 목적이다 행 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라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시니라.

그래서 우리는 성령 받았는지의 여부를 방언과 예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대로 삶에서 그대로 나타내면서 살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1) 성령이 임하느니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함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내주하시고 즉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다. (성령 께서 자주 주권적인 방식으로 개인에게 오셔서 특별한 사역을 하도록 권면하고, 신앙에 큰 담대함을 주시고, 영혼에 대한 열정을 그들에게 부어 주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2) 영적으로 부족한 모든 것들은 예수님을 알고 신뢰함으로 채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