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율법과 약속 - 갈라디아서 3장 15~18절

차작가 2024. 1. 6. 12:53

3. 율법과 약속 (15-18)

복음만 강조되고 율법은 무시되어도 된다는 말씀인지, 신약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그것과 어떻게 연계해서 생각을 해야 될는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시작하려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라고 선언한다. 만일 율법을 지킴으로써 복을 받거나 구원을 받는다고 믿거나 가르친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전부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이외에 다른 것을 통하여 구원을 받으려 하거나 복을 받으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오직 복음만! 오직 은혜만! 오직 십자가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복음의 가르침 이외의 다른 모든 가르침은 배설물과 다름없다.

복음과 율법은 절충될 수도 없고 조화될 수도 없고, 병립될 수도 없고, 통합될 수도 없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다.

“신약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기록돼 있는데”라고 말씀한다. 야고보서 2장 26절의 말씀이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은 믿음의 실천을 말한다. 윤리적 생활을 강조하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행함’이 ‘구원의 전제 조건’이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야고보서에서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강조하는 윤리적 삶과 다르지 않다. 이에 관해서 갈라디아서 5장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지만, 여기에서 간략하게 말하면,

자유인 free human만이 윤리적이 될 수 있다. 은혜와 복음을 경험한 사람만이 도덕적일 수 있다. 자유를 무엇인지 알고, 그 자유를 체험한 사람만이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느끼며 윤리적으로 살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나의 행위와 나의 의로움의 댓가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인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다. 이것이 참된 윤리이며 참 믿음의 실천이다.

하지만 복을 받기 위하여 또는 벌을 받지 않기 위하여 ‘선행’을 행하는 것을 윤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복을 받기 위하여 또는 벌을 받지 않기 위하여 도덕적으로 살고 있다면, 이것은 ‘길들이기’ 또는 ‘훈련’ 또는 ‘노예근성’의 현상이다. 이것을 가리켜 ‘죄의 노예’, ‘율법의 노예’라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된 경건 훈련이 아니고, 동물 길들이기이다. 동물들이 조련사가 시키는 것을 잘 따라 하면 ‘먹는 것’을 상으로 준다. 이렇게 훈련을 잘 받은 동물을 가리켜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복’과 ‘상’을 받기 위하여, 또는 ‘화’와 ‘진노’를 면하기 위하여, 선행을 행한다면, 그것은 유치하며 노예적이며 더 나아가 동물적이라 말할 수 있다. 자유를 아는 사람만이 윤리적이 될 수 있다. 윤리와 실천은 자유에 대한 책임으로 나오는 것이다.

타율적으로 훈련받은 사람은 인격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책임감이 약하다. 이들은 역경과 고난을 잘 극복하지 못한다.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고난을 다른 사람이나 환경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 또, 복과 벌의 시스템 안에서 믿음을 지키면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속되는 고난과 역경의 원인을 자기 믿음의 부족으로 돌리기 때문에, 결국은 믿음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복과 벌의 시스템 안에서 종교적 신앙을 갖고 있다면, 더 많은 복을 보장해 주는 다른 종교로 언제든지 옮겨갈 수도 있다.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믿는 사람은 다른 신들도 종교적으로 믿을 수 있다. 예수님을 종교적으로 믿는 사람은 다른 종교로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율법적인 시스템 안에서 교회를 선택한 사람은 그 율법적인 시스템 안에 있는 다른 종교로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율법과 종교는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율법과 종교가 아니다. 복음은 율법과 종교가 아니다. 복음은 자유와 은혜의 진리이다. 율법적인 것은 ‘선행’ 또는 ‘윤리적 삶’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

15절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절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절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절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해석:

3: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사람의 예’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고, ‘사람의 언약’ 사람 사이에서 행해지는 ‘계약’을 일컫는다. 바울은 당시 로마 또는 헬라의 ‘유산 상속법’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고 있다. 그 법과 관습에 의하면 유언이 발언되거나 또는 유서가 작성되면 그 후에는 어떤 것도 그곳에서 삭제되거나 그곳에 추가될 수 없다. 바울은 이 법과 관습을 예화로 사용하면서 아브라함의 약속에 어떤 것도 추가될 수도 없고, 그 약속으로부터 어떤 것도 삭제될 수 없음을 말한다.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 약속들’은 바로 앞, 즉 갈라이다서 3장 14절에서 언급한 ‘약속들’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바울은 이 ‘약속이 ‘언약’, 즉 ‘유언’과 같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행해진 이 약속의 언약은 일상생활에서 행해지는 상속법과 같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창세기 13장 15절과 17장 8절을 새롭게 해석한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5).

이 구절에서 바울은 ‘네 자손’이 ‘자손들’ 즉 복수가 아니고, ‘자손’ 즉 단수인 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단수로 표현된 ‘자손’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 해석된다. 의미론적으로 이 ‘단수’는 ‘집단적 결속’ 또는 ‘공동체적 유대’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손’이며,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그 ‘자손’임이 함축되어 있다.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 즉 유대인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포함하는 것이라 해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민족들이 이 아브라함의 언약 아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바울의 성경해석의 방법은 참 중요하다. 그것은 ‘기독론적 구약 해석’이다. 바울은 구약성경의 창세기, 즉 모세 오경의 처음 책을 율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기독론적으로 christologically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복음적인 구약 해석이다. 구약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성취된다. 구약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구약의 모든 역사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 어떤 말씀도 그 자체의 ‘의미’와 ‘기능’이 강조되어서는 안된다.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로 풀어 설명하는 네레이티브 narrative이든지, 문학적 상상력을 시와 노래로 표현하는 성문서이든지, 제사법과 계약법을 포함한 구약의 모든 법조문이든지, 그 본문을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그 본문 자체가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와 종교적 기능을 강조한다면, 그 본분은 오로지 종교적 문헌 또는 종교적 법조문이 되고 만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본문을 기독론적으로 재조명하고 재해석하여 선포해야 한다. 바울의 성경해석 방법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참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이제 바울은 앞에서 언급한 일상생활의 상속에 관한 관습을 예로 들어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설명한다.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

바울은 16절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설명한 후, 유산 상속법 또는 유산 상속의 유언의 예를 들어서 적용하여 해석하고 있다. 바울의 포인트는 단순하다. “모세의 율법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체결된 지 430년 후에 주어졌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아브라함의 언약이 폐기되거나 수정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변경시킬 수 없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율법보다 먼저 주어졌다. 그래서 그 약속이 율법보다 우월하다. 바울이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유대적 율법주의자들은 아브라함의 약속보다 모세의 율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을 ‘아브라함의 약속의 책’이라 명하지 않고 ‘모세의 율법의 책’이라 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 전통에 따라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을 ‘토라’ torah로 부르고 있다. ‘토라’는 ‘교훈’ 또는 ‘율법서’를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율법’의 의미가 절대적이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이 토라 torah만이 자기들의 표준적인 경전으로 생각하며, 오경 이후의 책들, 즉 역사서들, 성문서들, 예언서들 모든 책들은 ‘토라’의 해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그들의 생활과 믿음의 표준이고 율법 외의 다른 것들은 율법에 비하여 열등하다고 해석한다. 그들에 의하면 성경의 중심은 출애굽기이고, 출애굽기의 중심은 ‘율법’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이 ‘율법’에 의하여 해석한다. 바울은 ‘율법’을 표준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말고 ‘약속’을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지금도 교회와 신학교에서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을 ‘모세 오경’ 또는 ‘율법서’ 라 부르는데, 이것은 아브라함보다 모세를 더 강조하는 이런 유대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아브라함의 약속’ 또는 ‘약속서’ 또는 ‘언약서’라 부르는 것이 바울의 해석 전통에 가깝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독론 적인 성경해석’을 선언적으로 주장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유대 전통의 율법적인 성경해석을 하고 있는 것은 참 안타깝다. ‘오경’을 ‘모세 오경’ 또는 ‘율법서’ 불러야 할 기독론 적인 근거는 사실 별로 없다. 유대인들의 성경해석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보수적 신학’ 또는 ‘정통적 신학’일까? 결코 아니다. 로마서 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기독론적 신학이 보수 신학이며 정통신학이다. 복음과 은혜의 신앙이 보수적 신앙이며 정통적 신앙이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보수적 신앙 또는 정통적 신앙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언약을 믿는 것이 보수적 신앙이고 정통적 신앙이다.

개혁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개혁은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약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칼빈과 루터의 종교개혁은 아직도 계속 되어야 한다. 우리가 칼빈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이 아니고, 루터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이 아니다. 진정한 개혁은 칼빈이 주장했던 ‘오직 본문’ sola scriptura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 본문이 말하는 ‘오직 은혜’로 돌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개혁은 루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돌아가는 것이다. 참된 개혁은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출발은 칼빈 또는 루터가 아니고 바울이다. 바울은 지금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 처음은 모세가 아니고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이 아닐까?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바울의 포인트는 “유산 상속은 약속에 근거한다.”이다. 달리 표현하면, “유산 상속의 약속은 언약적 관계 위에 있다"라는 것이다. 유산 상속은 율법적 관계 위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키면 유업을 상속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유업 즉 유산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처럼 ‘믿는’ 것이다. 약속에 대한 응답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았다.

적용:

율법적 표현은 율법적 신앙을 만든다. 예를 들어서, “ 주일을 지키면 복받는다"라는 틀렸고 “주일 예배드리자"라는 옳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립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니 주일 예배를 드리자!” 이렇게 말하자는 것이다. 꼭 복과 벌을 율법을 사용해야 주일 예배를 강조할 수 있는 것일까? 타율적이며 율법적인 신앙훈련이 아니라, 자율적이며 복음적인 영성훈련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헌금을 드리면 복을 받고, 헌금을 드리지 않으면 벌받는다."라는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으니,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쁘게 헌금을 드리자"라는 올바른 신앙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사회적인 복을 주셨다면, “내가 이런저런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다.” 또는 “내가 헌금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상급을 주셨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이제부터 은혜와 복음의 말을 해야 한다.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큰 복을 주셨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이 참되다.

“우리가 선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신다.” 고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자!”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 손해를 볼 수도 있고 희생을 받을 수도 있고 고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내어 주셨으니 우리가 어떤 희생과 고난을 받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게 삽시다. 이것이 은혜의 표현이다.

자유를 경험한 사람만이 책임을 안다. 자유를 모르는 사람은 책임적인 사람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실천과 삶이 성숙해지려면, 우리의 성품과 도덕성이 성숙해지려면, 먼저 하나님 안에 있는 ‘자유’가 무엇인지 체험해야 한다. 이 ‘자유’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한 길뿐이다.

그것은, ‘복음’이다.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이 복음의 진리이다. 다른 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