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율법을 벗어나 그리스도에게로 - 갈라디아서 3장 24~29절

차작가 2024. 1. 8. 14:10

성경, 해석: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 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

1) 초등 교사 해석: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 교사가 되었다는 말씀은 해석이 분분하다. 먼저 ‘초등 교사’라는 단어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개역 성경에는 ‘몽학선생’이라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헬라어 파이다고 고스 paidagogos의 번역된다. 파이다 paida는 어린아이를 뜻하고 고고스 gogos는 '데리고 다는 자’를 뜻한다. 그래서 파이다고고스 는 아이들을 학교로 데리고 갔다 데리고 오는 일을 하고, 또 아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는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일은 주로 그 집의 ‘노예’가 맡아 했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람은 ‘교사’ 또는 ‘선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사’는 헬라어로 디다스칼로스 didaskalos이다. 이 단어에 관하여 우리 가운데 혼란이 있는 이유는, 즉 이 단어를 ‘선생’이라고 번역하는 이유는, 이 단어가 교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페다고그 pedagogue 와 교육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페다고지 pedagogy의 어원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한 언어가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는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의미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은 역사적 언어학 historical linguistics 분야에서 자연스럽게 논의되는 주제이다. 한 언어도 역사적 흐름과 함께 의미론적 변이가 일어난다. 이런 역사적 언어학의 조명이 없이 오늘의 페다고그 pedagogue페다고지 pedagogy의 의미를 갖고 헬라어의 파이다고고스 paidagogos를 해석하는 것은 ‘시대착오’ anachronism이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헬라어 파이다고고스는 ‘교사’가 아니고 아이를 맡아 돌보는 ‘노예’라는 뜻이다. 그래서 파이다고고스를 ‘몽학선생’이라 번역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이 잘못된 번역과 함께 율법에 대한 이해도 잘못되었다. 바울은 이 단어 파이다고고스를 부정적 의미와 함께 사용하고 있다. 파이다고고스는 때로는 아이를 묶고, 가두는 일을 한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면 그는 더 이상 파이다고고스 아래 있지 않는다.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파이다고고스 아래 있다면, 그는 지적인 장애인이거나 인격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적으로 ‘어른 아이’ adult child이다. 갈라디아서 4장 2절과 3절에는 파이다고고스 아래 있는 것을 종노릇하는 어린아이 시절로 묘사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가 종의 신분으로 살 때에 우리를 가두고 매는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했던 또 다른 노예라는 것이다. 우리가 장성하면 더 이상 파이다고고스 아래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이라는 파이다고고스 아래 않게 된다.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영적인 ‘어른 아이’이며, 영적인 ‘장애인’이며, 영적인 ‘노예’가 된다.

2)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당신은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다. 이제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이라는 파이다고고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었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기뻐하시며, 당신은 영원히 사랑하시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제 당신에게 영적인 복을 은혜로 부어 주셨다. 다시는 율법의 종, 죄의 노예로 되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 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이 말씀의 강도는 아주 강하다. 그리스도의 시대가 옴으로써 율법의 시대는 갔다. 그리스도라는 빛이 오니 율법의 어둠은 사라지고 말았다. 율법은 범죄 행위를 지적하는 제한적인 목적이 있었으며, 이 제한적인 목적도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라는 한정적인 기간 동안만 유효했다. 이제 믿음이 온 후로는, 약속하신 자녀인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부터 율법의 역할은 끝났다. 우리는 더 이상 파이다고고스라는 노예의 감독을 받지 않는다. 여기에서도 파이다고고스를 ‘초등 교사’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파이다고고스의 역할이 완전히 끝났음을 선언했다.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너희가 다!” 바울은 갑작스럽게 호칭을 바꾸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른다. ‘하나님의 아들’은 갈라디아서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도 바울은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앞에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고 말했다. 바울은 이제 3장 26절에서 아브라함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약속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아주 친한 사이,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관계, 하나님과 우정을 나누는 관계를 말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에서 ‘세례’라는 용어가 처음 나오는 말씀이다.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과 ‘세례’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을 같은 개념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즉 믿음을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을 바울은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했다.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바울은 26절에서 “너희는 다”라고 말했고, 27절에서 “누구든지”라 말한 것을 이제 28절에서 다시 강조하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과 문화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문화적 연합 cultural unity이다. “종이나 자유인이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급과 지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적 연합 social unity이다. "남자나 여자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차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바울은 이제 결론을 맺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약속된 자손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약속된 자손인 것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약속된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약속을 유산으로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는 첫째, 아들과 딸로서 누리는 자유이다. 둘째,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자유이다. 셋째, 문화적, 사회적, 성적 차별이 없는 자유이다. 넷째, 아브라함의 약속, 즉 축복과 번성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는 자유이다. 왜냐하면 노예나 종은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아들과 딸만이 부모의 유업을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적용:

나는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그리스도와 하나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딸이다.

나는 율법으로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 수록 하나님은 두려운 분으로, 진노하시는 분으로 느껴진다. 율법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우리는 아들과 딸의 자랑과 기쁨을 갖지 못하고, 그 반대로 종과 노예의 수치와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율법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스스로 비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친밀하고 사랑스럽게 살 수 있다.

2장 20절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이 나의 힘이고 믿음의 고백이다. 이 말씀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나는 부족하고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존재였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 내가 주님의 딸이 되었고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에게 말씀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