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지 말라 - 갈라디아서 4장 6~11절

차작가 2024. 1. 10. 13:57

성경, 해석: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우선 6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들의 영이 우리 마음 가운데 와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들의 영, 즉 성령이 와야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교회 다닌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 다닌 사람은 모두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봐야 할까? 물론 아니다.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교회 다니기 때문에 교회 문화에 젖어서 하나님이란 신을 아버지라는 다른 호칭으로 불러주는 정도의 것으로 볼 수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내가 의지할 분으로서의 아버지이다. 나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음을 알고 오직 나의 힘이요 나의 도움으로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우리를 또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예수께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4:7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7절에 종이 아니요 아들이라는 말은 아들의 영을 받은 자는 이제 세상에 매여서 살아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하여 능력 있는 자가 되어야 하고, 능력 있는 자가 되기 위하여 공부해야 하는 것이 초등 학문이다. 신자는 공부는 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 학문으로도 천국은 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마디의 말씀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거침없이 부르고 있다. 천국을 소망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 된 새로운 환경에서 살려고 하지 않고 옛날의 환경 방식 그대로 살려고 한다. 옛날 방식으로 사는 것이 더 든든하다로 생각하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세상일이 잘 안돼서 도와달라고 부르는 호칭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천국 간다는 그 사실이 너무 기뻐서, 이제는 땅의 것은 나에게서 희미해지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더욱 확실해지는 그 기쁨에서 부르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유업을 이을 자로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4:8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권능은 온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는데 그 하나님의 권능을 무시하고 세상에 복종하는 모습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애굽의 바로 왕이 두려워서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모습과 같다. 하나님은 애굽의 왕까지도 주관하고 계시는데 그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애굽의 힘 있는 바로 왕만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신자가 세상의 눈치를 보고, 세상을 두려워하고, 세상에 복종하는 것은 결국 세상에 잘 보여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 가면서 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면서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기를 변호하려고 한다. 성경은 이러한 자기변호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세상의 종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의 본능상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8절의 그때의 상태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성경이 뭔가 나를 변호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9절로 넘어가면 그러한 느낌을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한 때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본능상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제 네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때의 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느냐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종으로 사는 것은 용납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때와 이제는 하나님을 알기 전과 하나님을 알고 난 후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세상의 종으로 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다면 그때의 모습은 벗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되었음을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아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이 가신 길 외에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성경을 멀리할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게 된 자가 하나님의 종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지금 어떤 형편과 환경에 처해있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때에는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것이 복인 줄로만 알고 그 복을 얻기 위해서 세상 눈치도 보면서 세상의 종으로 살았는데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는 그것이 다 세상의 초등 학문이요 멸망으로 끌고 가는 것임을 알고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가 은혜이고 최고의 복은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임을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런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할 수 있다. 말씀을 볼수록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들이 깨달아지기 때문에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그들은 날을 지켰다. 즉, 안식일뿐 아니라 한 달 중 첫날과 마지막 날에 관한 율법을 지켰다. 그들은 또 달에 관한 율법을 지켰다. 절기와 해에 관한 율법, 즉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 을 지켰다. 그들은 이러한 율법을 지키되 보통 지킨 것이 아니고, 삼가 지켰다. 정성껏 지켰다. 갈라디아서 2장에는 할례에 관한 율법이 이슈이었지만, 4장에는 날과 달과 절기에 해에 관한 유대인들의 대표적인 율법이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2장에서 할례를 예를 들어 말했을 뿐이지, 할례 하나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또 4장에서 이런 예를 든 것으로 보아, 우리는 바울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율법들 가운데 몇 개의 중요한 율법이 아니라, 율법주의자들이 정성껏 지키려고 하는 ‘모든’ 율법인 것을 알 수 있다.

4: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질문해야 한다. 그들이 율법을 왜 그렇게 철저히 지켰을까? 율법을 지키는 목적과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종교철학적 질문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 율법주의자들로부터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들었을 때,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 말을 듣고 율법을 정성껏 지키게 된 의도와 동기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동기와 의도가 의식적일 수도 무의식적일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복을 많이 받기 위해서이다. 율법을 지키지 아니했을 때 무엇인가 불행을 만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삼가 지키는 것은 ‘지성이면 감천’의 행위이다. 이것은 정성이 지극해야 하나님을 감동시키며, 정성이 모자라면 하나님이 분노하신다는 일반적 종교 신앙이다. 바로 이 삼가 지키는 행위가 바로 율법 행위이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기 위함이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불행과 화를 피하자는 것이다. 이 삼가 지키는 행위가 바로 ‘자기의’이다. 삼가 지킴으로써 무엇인가 얻었다면, 이것은 바로 삼가 지킨 자신을 의롭다고 인정하며 스스로 높이는 행위인 것이다.

적용:

복을 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다. 건강하고 싶고, 돈을 많이 벌고 싶고, 사회에서 영향력을 갖고 싶어 한다. 그리고 더 편하게 살고 싶고 문화적인 삶을 살고 싶고 등등. 이러한 바램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또 이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요구하는 것, 때로는 때 쓰는 것은 자녀의 특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건부로 구해선 안된다.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하겠으니 나에게 무엇을 주십시오!” 또는 “하나님, 내가 무엇을 했으니, 나에게 무엇을 주십시오!” 등등.... 이러한 조건부의 기도는 타락할 수도 있다. “하나님, 내가 이것을 행하고 지키면서 이것을 구했으나 하나님께서 주지 아니했으니, 앞으로는 내가 이것을 행하지 않고 지키지 않겠습니다.” 등등....

사실, 조건부로 기도하다가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서,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또, “하나님은 내가 주일 성수하면 나에게 복 주신다.” 또는 “내가 십일조를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많이 주신다.” 이렇게 생각하거나 말해서도 안된다.

만약 복을 받고 싶다면 그냥 복을 달라고 기도하고 병이 낫기를 원한다면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기도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다. 기도의 응답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의 교인으로서, 이 사회의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헌금을 책임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적어도 십분의 일은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서 나의 수입의 십분의 일을 기쁘게 내어 놓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성숙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

우린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종이 아니고, 종교의 노예도 아니다. 기복적 신앙이나 무속적 신앙의 머슴이 아니다. 이제는 ‘무엇을 삼가 지키면 복받고, 삼가 지키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한다. 이제부터는 ‘내가 무엇을 지켜서 복을 받았다. 내가 무엇을 지키지 않아서 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우리가 어떤 복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무엇을 행했거나 지켰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부어주실수록, 그에 대한 응답 즉 책임은 더 커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