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갈라디아 교인들의 지극한 사랑 - 갈라디아서 4장 12~15절

차작가 2024. 1. 11. 12:05

E. 회복을 위한 해산의 수고 (4:12–20)

1.갈라디아 교인들의 지극한 사랑 (12-15)

갈라디아서 4장 11절부터 20절을 통해서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성품에 관하여 함께 살펴봅시다. 첫째,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보여 준 첫사랑, 그 첫사랑의 자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다음, 그 첫사랑이 어떻게 타락하여 자유가 율법으로 전락했는지 살펴 봅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락한 그 사랑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지를 알아봅시다.

성경, 해석:

4: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의 어조가 부드러워졌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호소하고 있다. “내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만약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과 우정을 나눌 수도 없었다.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해졌기 때문에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제 너희들도 다시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라.”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말아라!” “너희들은 나처럼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라!"라고 간곡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했다"라는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해방되는 이 자유의 메시지를 처음 전했을 때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을 반대하거나 공격하지 아니하고 기쁘게 받아들였음을 말한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바울과 영적인 사귐을 갖게 되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사랑의 시작이다. 사랑은 자유와 함께 시작한다. 자유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자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나누는 사랑은 소유, 복종, 탐욕, 또는 거짓과 쾌락이다. 자유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사랑의 시작, 그리고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사랑,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의 사랑은 자유와 함께 시작되었다.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시작된다.

4: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이 말씀 그대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찾아갔다. 문제는 사람들이 바울을 대하는 태도였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라는 사람을 보느냐, 아니면 바울이 가지고 간 복음을 보느냐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이다. 지금 자기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느냐에 따라서 사도를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면 바울이라는 사람을 보지 않고 바울이 들고 간 복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서 무슨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바울이라는 사람을 보게 되는 것이다.

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사도 바울이 처음에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의 모습은 볼품없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 교회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14절에서 말한다. 다시 말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을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지 아니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가지고 판단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육체의 약함, 즉 볼품없는 모습 그대로 갈라디아 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았다. 외모야 어떻든 그들은 바울은 환영하고 영접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14,15 절이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의 복음을 원했다. 순수하게 복음만이 자기들을 살린다는 것을 알고 복음을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의 마음이 변한 것이다.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 이 가시가 간질, 또는 심한 안질, 또는 척추와 관련된 질병인지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육체의 가시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 고통의 강도가 심하고, 그 고통의 기간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율법적으로 판단한다면 육체의 질병은 영적인 문제의 결과일 수 있다. 즉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지 아니한 형벌 또는 징계로서 육체에 가시가 꽂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질병을 보고 바울의 믿음과 성품과 경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가 옳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대에 보편적인 세계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환영했고, 그의 복음의 메시지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그들이 율법적 공식으로부터 자유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할 만큼 바울을 사랑했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복음이다. 사랑은 은혜와 함께 시작한다.

적용: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이고, 연약하게 보이는 그것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고 강하게 보이게 되어있다.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사랑하기 때문에 강한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게 된다. 내가 그 사람을 섬기기 때문에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참 사랑은 은혜와 자유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나의 추함과 연약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열등감과 우월감도 사라지게 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가 아름답고 경건하고 도덕적이고, 즉 우리가 율법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는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 있는 그대로 서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사랑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더 경건해지거나 더 도덕적이 될 필요가 없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벌써 이미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