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율법에서 속량된 자녀 - 갈라디아서 4장 1~5절

차작가 2024. 1. 10. 13:56

D. 상속자답게 살라 (4:1–11)

1. 율법에서 속량된 자녀(1-5)

바울은 유대 사회와 로마 사회의 관습을 예로 들면서 율법적 삶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로마 사회에서 아버지의 상속을 받을 아들이 법적으로 아버지의 모든 권리를 갖고 있지만, 그가 어렸을 때에는 그 집의 종들과 함께 지낸다.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는 다른 종들이 그 아들을 돌보게 된다. 앞장에서 초등 교사 또는 몽학선생이라 번역된 파이다고 고스 paidagogos에 대하여 설명했다. 이는 주인의 아들을 돌보며 가르치는 노예였다. 오늘 본문에 후견인과 청지기가 나오는데 이들도 그 집의 노예이다.

성경, 해석:

4:1 "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

유업을 이을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환경에서 자란 것은 아니다. 주인이 자기의 아들이 어릴 동안에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두어서 정한 기간을 지내게 하신 것 같이 유업을 이을 자, 즉 하나님의 아들이란 명분으로 모든 것을 상속받을 주인이지만 어렸을 동안에는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서 종노릇하게 하셨는데 정한 기간이 되자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뀐 환경이다. 초등 학문의 종에서 유업을 이을 자로 바뀐 것이다. 유업을 이을 자로서의 환경은 초등 학문의 종으로 살아왔던 그 환경을 벗어버릴 것을 요구하는 데 벗어버리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유업을 이을 자로서의 환경,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는 환경과 초등 학문 아래서 종으로 살아가는 학문은 어떻게 다를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 서로 어떻게 다르냐는 것이다. 우선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은 안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교회 다니는 것과 다니지 않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 되고 안되고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 다니는 것과 다니지 않는 것의 차이점은 살아가는 생활 환경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헌금하고, 하나님 이름 부르면서 기도한다는 것의 차이로 끝나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 아들과 아들이 아닌 자의 차이가 될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과 아들이 아닌 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살아가는 방식 자체에 대한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4: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바울 시대의 로마에서도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주인의 아들과 노예의 아들이 함께 놀았다. 바울은 이 관습을 예로 들면서, “우리도 이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의 초등 학문’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초등 학문’은 헬라어 스토이케이온 stoixeion의 복수인 스토이케이아 stoxeia를 번역한 것이다. 고대 헬라 철학에서 우주의 기본 원소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헬라 철학자들은 우주가 땅, 공기, 불, 물 - 이 네 기본 원소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설명했다. 여기에서 우주의 기본 원소들이 우주의 cosmos의 스토이케이아 stoixeia이다. 바로 이것을 ‘이 세상의 초등 학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철학과 종교의 기본 원리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초보적이거나 기초적인 것, 또는 초등학교 수준의 유치한 학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철학과 종교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다. 헬라 철학에는 종교가 구별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세상의 초등 학문’은 사실 ‘이 세상의 고차원적인 학문’ 또는 ‘수준 높은 철학’ 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우리의 사고와 감정, 등 모든 것을 지배했던 철학과 종교가 초급에 해당된다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3:8에서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진리를 알기 전, 우리가 오직 은혜로 아무 값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기 전, 이 진리를 깨닫기 전, 즉 율법의 인도를 받고 살던 시절은 이 세상의 종교와 철학에 종 노릇한 것이었다. 그 종교와 철학은 초등 학문이었던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이 초등 학문에 종노릇하다가 이제는 예수님을 믿게 되어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살고 있다.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결코 성차별적인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실 때 꼭 여성의 몸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사용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성의 몸을 통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아들과 딸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곧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들을 속량해 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다. 그런데 다시 종으로 돌아갔다.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적용:

율법 아래 종노릇 하는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라 부를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날 기도하는 내내 계속해서 "아빠!"만 아마도 몇 시간을 불렀던 것 같다.

막연히 신은 존재한다!라는 마음으로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나의 삶의 목적을 찾고 싶었었다.

그래서 철학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이후 예수님을 믿고 완전히 거듭남을 경험하고 난 세상은 분명히 전과 후로 나누어지는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유였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십계명의 그 어느 하나도 우린 지킬 수가 없다.

단 한 번만 지키지 않아도 완전하지 않기에 율법은 범하는 것이 되고 만다.

살인하지 마라! 하지만 수없이 마음속에서 미워하고 죽이기도 하는 우리이다.

심지어는 마음으로 짖는 것이 죄임을 알기에 그 억압이 꿈에서 살인자가 되기도 한다.

들키지 않을 뿐이지 우린 수많은 죄를 짓고 율법으로 정죄하고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죄인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랬던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이 그 죄를 속량하시며 자유함을 누린다는 건 기적이다.

죄인이 감히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도 은혜이다. 우리가 율법을 잘 지켜서.. 우리가 완벽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 진정한 자유는 우리의 상태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야 자유가 비로소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