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율법의 아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3:19–29)
1. 율법의 역할 (19-23)
19절부터 25절까지 말씀은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리스도 신앙과 모세의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본문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에 관해서 집필된 주석서와 논문, 그리고 행해진 신학적 토론 등의 양은 엄청나다. 19절부터 20절까지는 율법의 역사적 목적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고, 21절부터 25절까지는 율법의 역사적 기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영원하다면, 그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19절 이하의 말씀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점진적 계시” progressive revelation로 설명한다. ‘점진적 계시’는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적게, 부족하게, 불완전하게 계시하시고, 그 후 시간이 갈수록 점진적으로 많이, 충분하게, 완전하게 계시하신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시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그 시작은 모세에 가서 완전해졌다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런 사상이 달랐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점진적 계시가 잘못된 사상이라면, 율법이 주어진 목적이 무엇일까? 바울은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율법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기 때문에 추가로 주어졌다. 둘째,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다. 약속은 영원하지만 율법은 한시적 temporal이다. 셋째,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풀어졌다.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세 가지 목적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교회사에서 율법의 목적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해 왔는지, 그 역사와 논점을 잠깐 말씀드리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에 의하여 율법은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성령님에 의하여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에 의하면 율법은 현재 그리스도인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 율법은 단지 지난 세대의 유물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은 교회사의 초기에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마르시온 Marcion 과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다.
둘째, 율법은 하나님의 미완성된 첫 번째 계시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에 의하여 영감으로 기록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완전하게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종은 아니지만, 즉 율법 아래 있지는 않지만, 율법 안에서 삶의 원리를 발견하고, 그래서 믿음과 성령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그래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철저히 행하며, 더 나아가 그 이상까지도 실천한다는 것이다.
셋째, 모세의 율법은 현재 교회의 규범으로서 여전히 효과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것이기 때문에, 그 효력은 영원히 계속된다고 믿는다.
율법의 목적에 관한 입장은 이렇게 교회사적으로 크게 세 개로 구별되어 여전히 신학적인 논의와 교리적 논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율법의 목적을 어떻게 정의하는 것이 옳을까? 그리고 율법의 목적을 아는 것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예! 아주 중요하다.
신학자들은 율법의 세 가지 ‘용법’(用法) three uses of the law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율법의 제1용도는 ‘죄를 깨우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율법의 용도를 통하여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무력으로 인하여 그 법을 지킬 수 없게 되고 이로 인하여 인간은 절망하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에 떨게 되고 양심의 끊임없는 저주와 가책에 휩싸이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만을 갈망하게 된다.
율법의 제2용도는 우리의 양심과 함께 사람들이 지독하게 타락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양심으로 인하여 쉽게 극한 타락으로 치달리지 못하게 된다. 영구 불변의 도덕적 규범인 율법이 언제나 사람들의 양심과 사회법에 기준을 제시함으로 사람들은 극악으로 달리지 못한다.
율법의 제3용법이 있는데, 바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율법은 성화에 관련된 것이고, 주로 십계명을 의미한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복음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믿는 자를 해방시키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불필요한 것이라고 하지만, 칼빈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야 참으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율법이 필요한 것을 역설하였다.
분명히 칼빈은 루터와 다름없는 종교 개혁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원인이라 (오직 믿음) 지적하지만, 동시에 구원받은 영혼들은 율법의 정신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그 마음으로 이룰 수 있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율법의 제3용법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바르게 인도하는 가이드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성경에 나타난 율법의 용도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한다.
첫째, 일반적 용도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억제하기 위하여 주셨다.
둘째, 신학적 용도로서 인간에게 그의 죄성을 보여 주어 회개를 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의 이중 용도 외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 그것은 도덕적 생활을 위한 용도로서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부분에서는 율법의 규례가 무용하나 율법의 계명과 도덕법은 그리스도의 법안에 수용하고 포함되어 새 계명으로써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을 기준하는 실행으로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 사랑의 내용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율법의 목적과 용법에 관해서 교회사에서 많은 토론과 논의가 있었는데, 이러한 토론과 논의들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의 목적에 대한 질문과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율법들을 왜 우리에게 주셨을까? 그 율법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교회사에서 이루어졌던 논의와 토론들을 참조하면서 우리는 율법의 목적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본문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들은 특정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성경과 해석:
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
첫째, “율법은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 율법은 사람이 죄를 범하기 때문에 추가로 주어졌다. 사실 이 문장을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졌다는 해석이고, 둘째,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를 범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두 해석은 서로를 보완해 준다.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면 율법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율법과 죄가 서로 떨어질 수 관계임을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다.
바울은 21절-22절에서 “율법은 사람을 살게 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24절에서는 ‘율법은 몽학선생’이라 말하고, 로마서 3장 20절에서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말하고, 로마서 5장 13절에서는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보면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어떤 행동이 죄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을 재판하는 도구이었다.
3: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율법이 약속보다 못한 이유는, 율법이 주어진 이러한 상황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모세를 중보자로 세우셨으며, 또 모세를 중보자로 세우실 때에도 천사들을 통하여 하셨다. 이것을 다이어그램으로 표시한다면 이렇다.
하나님
천사들
모세
시내산의 이스라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가 천사들과 사람들 사이의 중보자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천사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사용하시어 모세를 사용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중보자가 없이 아브라함과 직접 언약을 체결하셨다. 이것은 중요한 상황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일대일로 직접적으로 체결된 약속이 간접적으로 주어진 율법보다 우월하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율법은 약속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1절-29절을 통해서 지난 시간에 이어 율법의 역사적 기능에 대해서 나누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 율법 아래 갇힌 삶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바울은 바로 앞에서 즉 갈라디아서 3장 19절-20절에서 율법의 목적은 죄를 드러내기 위함이었고, 이 목적도 오로지 한정적인 기간 동안만이라는 진리를 명백하게 설명했다. 이제 21절, 그는 다른 각도에서 율법과 약속의 관계에 대하여 질문한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바울의 대답은 간단하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다.
하지만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의 이 간단한 질문과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다. 바울도 그들의 반응에 대하여 알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바울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21절의 질문에 대한 답과, 그 답에 대한 설명이 21부터 25절의 본문이다.
먼저 21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이것은 율법은 생명을 가져올 수 없다는 진리를 선포한다. 생명과 구원에 관한 한 율법은 무능력이다. 이에 대하여 율법주의자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율법이 곧 생명이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율법의 해석서로서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미쉬나에 이런 말씀이 있다. “율법이 많을수록 생명도 많다.”("Lots of Torah, lots of life.", 아보트 2:8). 이것은 토라의 가르침을 많이 받게 되면 영생을 얻게 된다는 믿음을 반영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타민족들과 구별될 수 있고, 이것이 곧 생명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의 율법에 대한 이런 믿음에 대하여 바울은 반대했다. “만약 율법이 이렇게 생명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라면,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1)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라는 율법의 기능을 말한다. 이 본문에 ‘성경’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그라페 graphe인데, 이것은 ’기록된 것‘을 의미한다. 즉 ‘기록된 율법’을 가리킨다. 그래서 22절을 다시 읽으면, “그러나 기록된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이다. 이것은 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를 다른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19절은 율법은 죄를 드러내기 위하여, 즉, 범죄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범죄사실에 대하여 유죄를 인정하기 위하여 주어졌다는 말씀이고, 22절 ‘기록된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는 율법이 유죄를 인정하는 죄인들을 감옥에 가두기 위하여 주어졌다는 말씀이다. 율법은 ‘모든 것’, 즉 온 세상, 온 세상 사람들을 죄의 감옥 안에 가두어 둔다. 율법적인 신앙은 죄의 감옥 안에서 사는 삶이다. 율법적인 신앙은 죄의 무덤 안에서 사는 삶이다. 율법적인 신앙은 생명이 아니고 죽음 그 자체이다.
2) 그리고 22절 하반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말한다. 율법이 모든 사람을 죄의 감옥 안에 가두어 둔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것들을 그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기 위함이다"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옳다’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죄의 감옥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 아브라함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그 약속을 누리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주신다는 것이다.
살인범 또는 강도들을 감옥에 가두는 이유는 자유인이 안전하게 살 수 있기 위함이다. 만약 시신을 무덤에 가두지 아니한다면, 그리고 그 시신이 부패하지 아니한다면, 살아있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괴로울까? 율법의 목적과 기능도 이와 같다.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 하고, 율법을 통해서 복을 받으려 하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은 ‘유죄’ guilty이기 때문에 그들을 감옥에 가두어야 하며 또 그들을 감옥에 가두어야만, 아브라함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받으려 하는 사람들은 ‘무죄’ innocent 하여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다. 다음, 바울은 율법 아래 매인 삶을 더 자세하게 설명하려 한다.
23절과 24절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 매인 삶”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율법의 기능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바울은 19절에서 “율법은 죄를 드러내기 위하여 주어졌고 이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23절에서 이 내용을 달리 표현한다. 그는 19절 ‘자손’이라는 표현 대신에 23절 ‘믿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19절 ‘범법함으로’ 라는 표현 대신에, 23절 ‘매인 바 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믿음이 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율법이라는 사슬에 매여 있었고, 죄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약속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믿음의 시대가 왔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율법을 지키는 시대가 끝나고 약속을 믿는 시대가 왔다.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성령의 시대가 왔다. 만약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고 싶다, 그것은 ‘잘못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몸은 현재에 살면서 영혼은 과거의 종교에 매여 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옷을 입고 있지만 유대교라는 율법주의에 매여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죄인으로서 감옥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이다.
적용:
오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영원하므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을 받을 수 있다이다. 구원은 약속을 믿을 때 이루어진다.
그리고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우리의 본성이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어떤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범죄 행위임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이다. 율법의 제삼 기능, 즉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기능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율법은 한시적으로만 그 기능을 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만 그 기능을 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율법이라는 사슬에 매여 살아서는 안된다. 믿음의 시대, 약속의 시대, 성령의 시대에 우린 살아야 한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심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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