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교리 관련: 은혜와 율법 – 믿음으로 의롭게 됨 (3–4장)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에서 바울은 복음의 유일성을 강조했다. 오직 은혜로만, 오직 복음으로만, 오직 계시로만! 바울은 복음에 율법의 첨가는 허용될 수 없음을 역설했다. 율법의 첨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유일성을 주창할 때,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에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말했는데, 이제 3장 1절부터 5장 12절까지는 다른 각도에서 복음의 유일성을 설명한다. 이 부분은 갈라디아서의 두 번째 파트이다. 그 가운데 오늘의 본문 3장 1절부터 5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체험을 통해서 복음의 절대성을 설명하게 된다. 바울은 이렇게 질문하면서 시작한다. “너희들, 갈라디아 사람들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체험했는가?” “성령을 어떻게 체험했는가?”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체험했는가?” “그 체험을 통해서 무엇을 배웠는가?”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복음의 진리를 설명한다. 이제 당신은 이 말씀과 함께 당신의 체험을 돌아보면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A. 경험으로 얻은 개인적인 주장 (3:1–5)
성경:
1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절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절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절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해석: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이같이 책망을 하는 이유는 바울을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오직 은혜를 말하는 복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행위를 주장하며 육체를 신뢰하게 하는 다른 복음을 따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서두에서부터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내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에는 바울의 놀라움과 함께 사랑과 분노가 섞여 있다. “어리석도다” anoetos는 단어는 ‘생각이 없는’ ‘지각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정신적 장애 또는 지적인 장애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진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파괴하는 가르침을 받았을 때, 그들의 영적 지성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의 자세가 잘못되었다. 그래서 판단이 흐려지게 되었고, 그래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의 마음의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지 못했기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도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만난 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24:25) 제자들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완전히 믿지 못했었다. 그들은 믿음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해에도 실패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어리석음’이었다. 갈라디아 사람들의 ‘어리석음’도 이와 같다. 그들은 바울이 가르쳐 준 ‘복음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 그래서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유대주의자들의 ‘꾀임’에 넘어간 것이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 ‘꾄다’는 ‘유혹한다’, ‘아첨하는 말을 한다’, 더 나아가 ‘매력적인 말을 한다’를 뜻한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마력에 넘어간 것’이나, ‘마술에 속은 것’이 아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갈라디아 사람들의 판단력이 흐려졌고, 여기에 갈라디아 사람들의 욕심과 유혹이 덧붙여져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스스로 올무에 걸려든 것이다. 자기 욕심이 없이 유혹에 넘어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확신한 체험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그들은 모두 십자가의 의미를 확실하게 체험했었다. 복음의 진리가 그들에게 분명하게 체험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고, 그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에게 구원이 임했다는 것을 체험했다. ‘밝히 보인다’ prographo는 '시장이나 광장에 공고문을 붙일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요즈음 현수막을 만들어 붙이거나 시청 앞 광장의 전광판에 공고하는 것이다. 그것을 보지 못한 사람도 없고, 그것을 보고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할 사람도 없다. 모든 것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은 개인적 또는 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성령은 공동체에 임하신다. 성령께서 단 몇 사람 또는 몇 지도자에게만 오시는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소수의 몇 사람, 중요한 몇 사람, 지도자 몇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다. 공동체에 공개적으로 임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가 오면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이라고 예언자들이 예언했다(요엘 2:23-32). 이 새로운 시대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과 함께 시작되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체험한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이다.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명백하게 체험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일지라도 이 구원의 길에 덧붙여질 수 없다. 갈라디아 교회는 그리스도 체험을 확실하게 했고 또 그들은 성령 체험도 확실하게 했다.
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2절은 ‘성령’이 갈라디아서에 처음 나타나는 본문이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과 ‘육체’가 서로 반대 개념으로 나타나는 사실이다. 성령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율법으로 다시 옛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육체로 마친다"라고 표현되었다. 바울의 세 개의 질문을 쉽게 풀이하면 “너희들은 성령 받은 체험, 중생의 체험, 놀라운 구원의 사건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체험들이 어떻게 일어났느냐? 누가 그 체험들이 일어나게 했느냐? 처음을 기억하라!” 성령은 하나님의 생명의 임재이다. 성령은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적으로 활동하고 게시는 능력이다. 성령 체험에 관해서 이 본문에 함축되어 있는 진리를 자세하게 설명하면
첫째, 성령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와 함께 온다는 진리이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라고 묻는다. 그들은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기 위하여, 성령체험을 하기 위하여 특정 예식을 행한 것도 아니고 어떤 종교적 의식을 거행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체험한 것이 아니다. 성령을 체험하기 위하여 도덕적으로 성결하게 살았다거나, 율법적으로 보수적으로 살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십자가 복음이 공개적으로 선포되었고, 사람들이 그 진리를 것을 믿을 때 성령께서 오셨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
둘째, 성령과 육체는 철저하게 대립된다. 이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5장 16절부터 25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요점만 말하면,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복음을 듣고 율법을 지키면 마무리가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르쳤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을 듣고 율법을 지키면 그것은 치명적인 타락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질문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후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넌 후 다시 홍해를 건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은 ‘치명적인 어리석음’인 것이다.
‘율법의 행위’를 ‘육체’로 표현한 것은 설명이 많이 필요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9절부터 21절에서 ‘육체의 일’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이렇게 열거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여기에 열거된 이러한 일들과 ‘율법 행위’를 연결한 것은 참 충격적이다. 율법이 오히려 그러한 비도덕적 일을 금하고 있지 않는가?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음행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음행’이다는 말이 아닌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곧 ‘우상 숭배’이다는 말이다. 이율배반적인 것 같고 모순적인 것 같지만 이것이 진리이다. 율법 행위는 육체의 일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상을 숭배해도 괜찮으니 우상을 숭배하라! 또는 우상숭배는 구원과 관계없는 것이니 우상을 숭배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을지라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우상을 숭배하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거나 또는 믿음으로 받은 구원이 더 확실해진다고 생각하는 것 바로 이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위에 열거된 모든 육체의 일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일들을 금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육체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은 것은 성령으로 시작된 것인데, 그 후에 다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더 받을 수 있고, 복을 더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인정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육체로 마치는 행위이다. 바울은 이러한 영적인 원리를 로마서에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했다(롬 7:10).
교회의 역사를 보면 믿음에 대한 가장 사악한 원수는 항상 비종교 또는 타 종교에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아니 자주 교회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도덕적 가르침과 종교적 현상들의 보이지 않는 힘이 복음의 원수가 되곤 했다. 도덕과 종교의 행위와 주장이 복음의 기초를 위협해 왔었다. 그렇다고 비도덕적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도덕적 계명을 기준으로 신앙과 비신앙을 구별하거나 어떤 종교적 예식을 기준으로 신앙과 비신앙을 구별하는 것은 은혜와 복음의 진리를 훼손시키는 사악한 원수이다. 도덕적으로 무엇을 하는 사람들과 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를 구별하는 선이 철저하게 그어지면, 그 결과로서 율법이 그 가운데 장벽으로 세워지게 된다. 그래서 은혜와 복음의 신앙이 율법적 종교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전락과 타락의 역사가 교회사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돌아온 탕자에게, “네가 이런저런 것들을 순종해라! 지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긍휼을 베풀 것이다"라고 항상 요구하고 있다. 결국 교회는 죄인들은 추방당하고 의인들만 남아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필요 없고 병든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의사로 오신 그리스도가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셋째, 성령은 새로운 시대의 능력이다. 열정과 생명의 활력과 기적의 원천이다. ‘영’ spirit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숨’(입김)과 ‘바람’의 의미도 갖고 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고, 내가 성령 안에 들어가는 것’,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영어로 ‘열정’ enthusiasm이라고 표현한다. 기독교는 열정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령론은 신학의 본질적인 파트이다. 성령의 실재가 없이는 계시와 교회는 소멸된다. 그래서 기적과 이사 와 가시적인 카리스마타 charismata(은사)도 없는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파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열정, 이 열정을 보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과연 너희 가운데 계시는구나!”라고 인정하게 되는 이 열정, 이 열정이 없다면 기독교는 공허하고 교조적이며, 그래서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에 불과한 종교에 불과하다. 위험한 열정이 교회 안에 들어올 가능성도 있지만, 이 위험한 열정을 예방하기 위하여 이 본질적인 열정을 교회에서 없애 버린다면, 그래서 이 열정이 교회 안에서 사라진다면, 이것은 교회가 잠들었거나 죽은 것을 의미한다. 열정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없다.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한다. 애당초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으로 된 일인데 지금은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 육체의 사람으로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죄는 사람이 육체로 살려고 하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육체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도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은 우리의 육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육체로 살고자 하는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곧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하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결국은 율법의 행위, 즉 육체를 신뢰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지 말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즉 성령이 함께한 성령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오직 주님만으로 만족하다가 나중에는 자기의 즐거움을 위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고, 뭔가 자기의 힘과 노력과 행위로 신자의 모습을 증명하기에 애를 쓰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면 그것이 곧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모습인 것이다.
우리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세상과 같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차츰차츰 세상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하나님께 기쁨을 구하기보다는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좋게 하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 이것이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것이다.
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괴로움’은 헬라어로 파스코 pascho인데,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체험한다’의 뜻을 갖고 있다. 체험이 고통을 수반할 때, 그리고 이 고통이 오래 지속될 때, 이 단어가 사용된다. 그런데 이 구절의 문맥에 고난 또는 핍박 또는 고통에 대한 암시가 없지만, 이 구절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고난의 체험을 헛되이 하였느냐? 과연 헛되냐?” 쉽게 해석하면,
“너희들이 그와 같이 많은 고난의 체험을 통해서 무엇을 배웠느냐?”
“고난을 통해서 과연 배운 것이 없느냐?”
“너희들이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 너희들이 이미 직접 체험한 것을 왜 버렸느냐?”
“너희들이 그렇게 많은 고난과 함께 많은 것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과연 헛되냐?”
결코 그럴 수 없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지 마쳐서는 안 된다.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을 때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성령님을 체험할 수 있다.
적용:
교회의 역사뿐만 아니라 주위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을 보아도 처음에 출발은 잘 했지만 나중에 진리로부터 떠난 신앙인들이 참 많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에 의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주님을 위하여 살다가, 나중에 율법주의와 자기 의의 체계의 함정에 빠져 버리고 만다. 율법주의는“이것저것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 형통해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복에 대한 약속만 무성할 뿐 복에 대한 열매는 없다. 왜냐하면 율법의 열매는 육체의 일이기 때문이다.
율법주의는 형식주의와 친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형식주의 올무에 걸리고 만다. 주님 안에서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이 내적인 능력 대신에 외적인 의식과 절차로 대체해 버린, 이 형식주의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성령의 체험은 율법의 행위 때문이 아니고 듣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체험이 은혜라면 이제부터 우리는 더 이상 어리석은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의 일로 마칠 수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모두 성령이 하신 일이라면 우리에게서 보이는 모든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한다. 헌금을 하든 봉사를 하든 모든 것이 자기 과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 만드신 것은 인간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할 일을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는 안식이셨던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살아라고 했다. 이것이 육체로 사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령으로 시작된 것을 육체로 마쳐지게 해서는 안 된다. 은혜로 시작하였으면 끝까지 은혜로 나아가야 한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오직 은혜만 믿고 의지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내 즐거움을 앞에 두고 나를 과시하고자 하는 것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입게 되고 많은 짐들을 지고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치 있는 사람은 자기를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보여주고자 하는 소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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