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외식에 빠진 그리스도인 - 갈라디아서 2장 11~21절

차작가 2024. 1. 4. 12:18

C. 바울이 사역하면서 주장한 복음 (2:1–21)

베드로를 책망 (11-21)

신자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며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은 지금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얘기들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과연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신자가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모든 소망이 하나님 나라에 가 있다면 그 신자는 철저하게 십자가에 다스려지는 삶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사람이 현재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지금의 가치 없는 것은 버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신앙의 모습은 분명히 그렇지를 못하다. 뭔가 하나를 버린 삶이 아니라 다른 하나를 지금의 자신의 삶에다 추가시키는 모습에 불과하다. 즉 현재와 미래 모두를 보장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좋아서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시킨다고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말하는 모습이 비일비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2천 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이 어떻게 해서 오늘의 우리에게도 구원의 효력을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분명 지금의 우리들은 십자가의 사건을 보지도 못했고, 그 피가 지금 우리들에게 흘려진 것도 아니다. 십자가는 역사 속에 묻혀 버린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는 지금도 여전히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것은 정말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십자가의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건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십자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말하고 믿음을 말하면서 살던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십자가의 말은 했지만 그 삶은 십자가와 거리가 먼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사도 바울의 심정은 가슴을 치고 싶을 정도로 답답한 심정을 가지고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11절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절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절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절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절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 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 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 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라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해석: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본문은 사도 바울이 게바를 책망했다는 말로 시작된다.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게 된 이유는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던 중에 유대인들이 자기 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봤다. 그러자 게바는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다가 그만 그 자리를 피해 버린다. 그 이유는 혹시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이방인과 함께 음식 먹는 것을 들킨다면 그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게바가 자기를 피하자 거기에 같이 있던 다른 사람들도 자연히 게바와 함께 자리를 피해 버린다. 바울은 이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애당초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뭔가 복음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게바는 복음대로 하지를 못했다.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결국 복음 앞에서는 하등의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두려워서 복음대로 하지 못하는 그 모습을 바울이 책망하는 것이다.

2: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바울은 십자가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면서도 외식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느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십자가 앞에서, 복음 앞에서 모든 외식을 벗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우리들의 신앙의 삶에서도 외식은 얼마든지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기도를 짧게 하든 길게 하든 그것이 십자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남들 앞에서 기도할 때 기도를 좀 더 길게 하면서 기도 다운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 기도를 통해서 남들에게 자신을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남들의 눈이 두려워서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 많다. 이것이 외식이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결국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것을 붙들고 있는 모습이다. 바로 이러한 것을 바울이 탄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과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 유대인들의 법에는 저촉이 되지만 복음 앞에서는 전혀 거리낄 게 없다. 오직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면 우리가 붙들 것은 복음이다. 그런데도 복음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공격받는 것을 싫어하고, 따돌림당하는 것이 싫어서 복음대로 행동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의지하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2: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 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말씀대로 하면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 외의 것을 붙들어서는 안되고, 내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믿음 외의 것을 내세워서도 안 되는 것이다. 믿음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로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을 헐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나의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 스스로 생각할 때, 구원의 도리를 알고 있고 십자가를 말하고 오직 믿음만이 나를 구원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수없이 말하면서도 기독교 아닌 것이 얼마든지 있고, 교회를 말 하면서도 교회 아닌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피는 말하면서 피는 눈에 보이지 않고 항상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만 관심이 가 있느냐는 것이 사도 바울의 탄식인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귀한 죽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말한다면 모든 관심은 나를 의롭게 하는 십자가를 향해야 하고, 나를 살리는 것이 세상이 아니고 십자가인 것을 안다면 결국 붙들어야 할 것은 십자가이지 세상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세상의 것을 붙들려고 애를 쓴다면 그것이 주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신자는 단지 십자가를 말하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서 눈이 띄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를 향해서 눈이 띄어 있는 자는 십자가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 몸을 버리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연히 주님을 향한 삶을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2: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 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예수님이 십자가로 헐어버린 것을 우리가 다시 세우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노력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다. '네가 십자가의 피를 믿은 증거로 이러 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십자가의 피의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에게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예수님께 바칠 것은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피를 믿는 내 속에는 이제는 내 욕심과 내 목표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다스리고 내 욕심은 애 안에서 떠나게 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게 해 달라는 그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피를 믿는 신자이며 사도 바울이 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주님의 피를 믿는 신자라면 우리 안에 주님이 살도록 하셔야 한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살아 계셔서 오직 주님의 것만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온통 나의 것으로 감싸져 있다. 내 마음은 모두가 내 욕심과 내 소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주님의 소망은 안중에도 없다. 이것이 십자가의 피를 믿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된다는 이 말을 너무 많이 들어온 말이고, 당연한 말이고, 잘 알고 있는 말이라고 해서 지나쳐서는 안 된다. 이 말을 지나쳐 버리는 자는 스스로를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게서 믿음 없는 모습을 하나하나 발견해야 한다. 주님을 믿지 못하고 나를 믿고 있고, 돈을 더 믿고 있는 자신의 불신앙의 모습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피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좀 더 깊이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 헐어버리신 것은 결코 다시 세우려고 하지 맙시다. 신자는 다만 십자가를 믿으면 될 뿐이다. 우리의 신앙행위가 의로움을 얻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신앙 행위로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이미 구약이 증거하고 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것이다. 그 피 때문에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서 그 사랑으로 헌금하고 봉사하고 신앙의 행위를 해야 한다. 그럴 때 그 속에서 사랑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는 죽고 내 안에 새롭게 사시는 주님의 피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귀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적용: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외식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을 바울은 질책하고 있다.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로 허물은 율법을 다시 세우고 있는 인간의 미련함을 책망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첫 사역을 할 때 교인들 중 권사님들이 나에게 늘 습관처럼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 어느 사모님은 본교회에서 사역하실 때 승무원 출신이라서 그런지 너무 화려하게 입으셨다는 둥 귀걸이를 컬러풀하게 하셨다는 둥 또 어느 사모님은 입이 짧아서 김밥 몇 개 집어먹곤 잘 먹질 않으셨다는 둥...." 남편 따라 부임한 사역지에서 첫 이야기가 앞에 섬기던 목사님 사모님이 잘못해서 교회를 망쳤다는 이야기와 험담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아! 이 교회에선 아무거나 잘 먹어야 살아남겠다. 옷은 색깔 없는 옷으로 입어야겠다"였다. 그래서 입이 짧은 나는 점심시간이 되면 두 번씩 가져다 먹었었다. 그러다 보니 집에 오면 항상 탈이 났었다. 옷은 그 이후 흰색, 검은색, 회색만 입었었다. 그렇지만 다른 색 옷을 입는 건 죄가 아니다. 입이 짧은 것도 죄가 아니다. 죄는 죄가 아닌 개인의 취향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그들의 행동일 것이다.

나는 이걸 알면서도 단지 비위를 거스르고 남편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따랐었다. 그리고 바울처럼 옳지 않다고 이야기 하기보다 그냥 말없이 들어주고 어설프게 웃었다. 사모는 인자하고 말이 없어야 하니 외식하는 편이 낫겠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새벽예배시간이었다. 교회 창립한 장로님 내외분은 늘 경쟁하듯 우리 부부가 나가야만 기도를 멈추셨다.

장로님은 의자에 안자말자 설교시간 코를 고시며 주무셨었다. 연세가 많으시니 충분히 이해하고 나는 전혀 비난하질 않았다. 나도 부모님이 계시고 오히려 이해가 되었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문제였었다. 새벽예배에 참석하는 걸 오늘 말씀처럼 외식으로 하셨었고 " 어느 장로님은 새벽예배 한 번도 안 빠지신다!"라는 말씀이 자랑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 심하게 골면서 주무셨고 아내 권사님은 깜짝 놀라서 깰 수 있도록 박수를 중간중간에 치시면서 장로님의 잠을 깨우셨었다. 그러다 보니 조용히 개인기도 시간에도 박수와 코 고는 소리를 번갈아 들으며 기도할 때 나는 속에서 화도 났었다. 왜냐면 그 속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기도하기가 정말 힘들었었다. 일찍 돌아가시면 조용히 기도하고 싶은데 반드시 우리 부부보다 더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셨기에 적당할 때 일어서야만 했었다. 그 부부의 외식하는 모습이 시험이 들고 때로는 나를 흔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도 자리를 옮겨 기도할 수도 있고 기도하지 않고 그냥 집에 와서 혼자 기도할 수 있었지만 기도하지 않고 일찍 가는 사모로 낙인이 찍히는 게 두렵기도 했었다. 세월이 흘러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중간에 새벽예배를 포기했었다. 이 문제로 남편과 이야기를 하고 시험이 든다면 오지 않는 게 좋고 사람을 두려워해서 억지로 그럴 필요 없다고 충고해 주었었다.

우리는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 신자는 다만 십자가를 믿으면 될 뿐이다. 우리의 신앙행위가 의로움을 얻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신앙 행위로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내 안에 내가 죽고 주님이 사신다면 이런 외식함도 일절 없을 것이다. 불쑥 불쑥 외식함과 사랑 없는 봉사와 스스로 높아지려 드러낸다면 허물어진 예수님과의 벽을 다시 쌓아 올리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