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자유의 복음 - 갈라디아서 2장 1~10절

차작가 2024. 1. 3. 11:54

1절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절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절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절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절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 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절 베드로에게 역사 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 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절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사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절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해석: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유대인 성도)와 함께 디도(이방인 성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바울은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라고 말한다. 이 일은 사도행전 15장의 사건을 가리킨 것 같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에 내려와 이방인들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크게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고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냈었다.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일을 위해 모여 많이 변론한 후,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등의 율법의 멍에를 메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아마 이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올라갔고 또 디도를 데리고 갔다. 바나바는,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에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한 자요(9:26),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요(11:24), 바울을 안디옥에 초청해 함께 그 교회를 가르쳤던 자요(11:25-26), 그 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자였다(13:2-3). 디도는 헬라인이라는 것(3절)과 그레데에 남아 교회를 돌본 사역자라는 것(딛 1:5) 외에는 성경에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14년 동안) 지금까지 해놓은 일)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은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라고 말한다. 이 일은 사도행전 15장의 사건을 가리킨 것 같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에 내려와 이방인들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크게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고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냈었다.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일을 위해 모여 많이 변론한 후,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등의 율법의 멍에를 메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아마 이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올라갔고 또 디도를 데리고 갔다. 바나바는,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에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한 자요(9:26),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요(11:24), 바울을 안디옥에 초청해 함께 그 교회를 가르쳤던 자요(11:25-26), 그 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자이었다(13:2-3). 디도는 헬라인이라는 것(3절)과 그레데에 남아 교회를 돌본 사역자라는 것(딛 1:5) 외에는 성경에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규례이었다. 그것은 남자의 성기 끝을 덮은 겉가죽(foreskin, 양피, 포피)을 잘라내는 의식이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아야만 했다. 이것은 율법에 규정된 하나님의 언약의 표시이었다. 율법을 따른다면, 디도도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 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새 언약 아래서 모든 사람은 할례와 관계없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의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할례받지 않은 헬라인 디도를 예루살렘에 데리고 올라감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가 쓸데없다는 복음 진리를 증거하기 위했던 것 같다. 특히 문제가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그 논쟁의 시점에 바울은 디도를 데려감으로써 행동으로 그 진리를 증거하려 했던 것 같다.

4: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던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교회에 당당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이 마귀의 전술이다. 마귀는 자기 사람들을 비밀 첩보원처럼 가만히 교회 안에 투입시킨다. 오늘날도 기독교계 속에 많은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진실한 종들은 그들을 분별할 것이다.

그들이 들어온 목적은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엿보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함이었다.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바울의 표현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드러낸다. 그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할례의 규례와 의무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적 율법들, 예를 들어 성전 의식들, 제사 의식들, 절기들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완전한 의를 이루셨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누리는 자유이다.

물론 그 자유가 도덕적 율법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는 방종에 빠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하게 하는 자유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우상숭배하지 말아야 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지 말고 탐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도덕적 율법들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이지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무거운 짐을 진 심정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가만히 들어와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파괴시키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거짓 형제들은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유대교인들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유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오해한 자들이며,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아군들이 아니고 적군들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건설자들이 아니고 파괴자들이었다. 그들은 주께서 피 흘려 사신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고 실상 미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긍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안에 사는 자들이 아니고 아직도 사망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이었다.

바울은 그 거짓 형제들을 알아차렸고 그들에게 한 순간도 복종치 않았다. 잠언 25:26은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워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라고 말한다. 진리를 가진 자는 진리를 가지지 못한 자 앞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 거짓 형제들의 사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진리와 배치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 곧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는 이 진리가 자신뿐 아니라 자기가 전도하여 믿게 된 모든 성도들에게도 있게 하기를 원하였다.

5: "또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유명한 이들’은 예루살렘의 원사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바울은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성경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매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직분보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형제 자매이며 한 식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원사도들은 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로 주신 복음은 충족하였다. 주께서는 원사도들에게 주셨던 그 동일한 복음 진리를 바울에게 주셨다. 바울의 복음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출한 그 복음의 내용은 바로 열두 사도들이 전파하였던 그 복음이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감으로써 그의 복음에 어떤 수정이나 보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복음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이 동일하다는 것이 증거 되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고 바울을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 즉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 이 교제의 악수는 바울의 복음과 베드로의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다른 말로, 이 교제의 악수는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라는 것을 증거 한 것이다. 이렇게 확인된 그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이 세상에 없으며, 오늘도 그 복음만이 모든 인생들에게 구원과 생명과 소망이 된다.

6: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

바울은 말한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있다면 단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11:29에 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큰 흉년이 들어 유대에 사는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보내는 일이 있었다. 사도행전 15장 때에도 유대에는 가난한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구제에 대하여, 바울은 이전부터 자신도 그 일을 힘써 행하여 왔다고 증거한다. 선행과 구제는 하나님의 명하신 뜻이며(신 15:7-11)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연한 의무이다(고후 9:13).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오늘 본문의 요점은 바울이 증거 한 복음의 내용이 베드로가 증거 한 복음의 내용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제의 악수’로 상징되었다.

적용:

오늘날 불신앙적 신학자들은 성경 안에 다양한 신학들이 있고 그 신학들 간에는 때때로 갈등과 심지어 모순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바울의 복음은 결코 베드로의 복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복음 진리, 그들이 전파하고 가르쳤던 복음 진리는 동일하였다. 사도들이 동일하게 밝히 증거했고 신약성경에 명료하게 계시된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고 이 복음만 오늘도 모든 인생에게 구원과 생명과 소망이 된다.

또 복음은 자유의 복음이다. 그것은 헬라인 디도를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한 바울의 행동에서 증거 되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주신 참된 자유, 곧 죄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참으로 소유하고 누려야 한다.

교회 속에서 인간이 만든 종교의식, 율법을 가장한 의식으로 얼마나 예수님이 주신 자유로부터 멀어지게 했는지 모른다.

사역을 할 때 예배시간 찬양 하나 선곡하는 것도 신앙심으로 포장해 정죄하는 걸 많이 경험했었다. 찬송가에 있는 곡이 아니면 다 죄악시하는 말도 안 되는 신앙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아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경험했었다. 교회에서는 기타도 안되고 교회에서는 드럼도 안된다는 그런 자신만의 신앙심을 고집하는 것은 불신앙과 다름이 없다. 우린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 율법으로 포장한 이기심이 얼마나 예수님으로부터 오히려 멀어지게 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이 곧 예수 안에 누리는 참 자유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