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교인들의 회복에 대한 갈망 - 갈라디아서 4장 16~20절

차작가 2024. 1. 11. 12:06

2. 교인들의 회복에 대한 갈망 (16-20)

성경, 해석:

4: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바울과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 오해와 불화가 생겼다. 무엇이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를 갈라 놓았을까? 그들의 사랑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 사랑이 왜 타락했을까?

처음에는 복음만을 원했고, 복음을 영접했는데 나중에는 그 복음을 도리어 외면했다. 갈라디아 교회가 복음을 외면하게 된 이유는 17절에 이어 나온다.

4: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행위를 주장하고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더 좋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앞에서는 초등 학문이라고 했다. 즉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한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 다시금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4: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어떤 사람들이 들어와서 바울과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 있는 사랑에 흠집을 냈다. 바울과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한 것이다. 그들은 율법주의자들이다. 17절과 18절에 “열심을 내다”라는 동사가 세 번 나온다. 이 동사는 헬라어로 ‘젤레오’ zeleo이고, 명사형은 ‘젤롯’ zelot'인데, 젤롯은 ‘열심을 내는 사람’, ‘열심당원’, 또는 그룹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 6장 15절에 ‘셀롯이라는 시몬’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열심을 낸다’는 동사는 열성적 유대주의자들, 또는 극단적 율법주의자들, 또는 유대 민족주의자들에게 사용되는 전문용어, 또는 고유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당원’들이 갈라디아 기독교인들에게 ‘열심을 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들처럼 유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유대 민족의 전통을 지키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자기들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유대 민족의 율법과 전통을 지켜야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큰 사랑을 받게 된다고 갈라디아 사람들을 설득했다. 이래서 갈라디아 사람들을 분열시키게 되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율법을 사이에 두고 분열하게 되었고, 민족이라는 개념을 사이에 두고 분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하거나 더 나아가 그것을 독점하려고 하면서 서로 분열하게 되었던 것이다. 좋은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좋으나 율법에 열심을 내는 것은 타락이다. 율법에 열심을 내는 것의 결국은 분열이다.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

4: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

 

적용:

스티픈 아터버언은 그의 책 “상처 주는 신앙, 치유하는 신앙: 건강한 신앙과 영적 학대 사이에 그어지는 미세한 선”에서 해악 한 신앙과 종교적 학대에 잘 빠지는 사람들의 특징 네 가지를 들었다. 즉 완고하고 엄격한 부모와 실망적인 경험과 낮은 자존감과 학대의 희생자들이다. 엄격하고 완고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 즉 율법적 사고와 율법적 신앙과 율법적 도덕을 가르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해악 한 신앙과 종교적 학대와 파괴적인 성격에 빠지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모들이 자기들은 그 누구보다 더 뜨겁게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들을 그렇게 엄격하게 교육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의 타락이다. 부모는 사랑이라 생각하고 믿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렇게 율법은 사랑과 행복의 탈을 쓴 증오와 불행과 죽음이다. 율법의 자유의 타락이고, 이것은 곧 사랑의 몰락이고, 이것은 곧 죽음인 것이다.

나도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꽤나 율법주의로 가르쳐 왔었음을 고백한다.

아이들에게 성경 암송시키고 도덕적이고 율법적으로 키웠었다. 그 속에는 사랑도 있었지만 목회자 자녀이니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게 해서는 안되며 타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율법적으로 아이들을 강하게 신앙인으로 키웠었다.

또 환경이 PK는 어떠해야 한다는 시선이 아이들을 많이 억압하기도 했었다. 감사하게도 아이들이 잘 성장해 준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으로 키운다고 했었지만 신앙은 개인의 체험이고 고백이라는 걸 요즘 실감하고 있다.

성령님이 아이들 마음을 터치하시고 감동시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은 학습이 아니라 개인의 체험인 것이다. 즉 성령님의 임재 없이는 모든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율법으로 다가가면 아이들은 그리고 우리는 타락하게 되어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동시켜서 우리가 변화를 받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자연스럽게 순종하게 되는 것이지 율법으로 지켜야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믿음은 책에서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 심장에서 일어나는 영적 감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