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종의 자녀와 자유의 자녀 - 갈라디아서 4장 21~26절

차작가 2024. 1. 11. 12:08

F. 하갈과 사라 (여종과 자유의 여주인) (4:21–31)

1. 종의 자녀와 자유의 자녀 (21-26)

1. 질문: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21절)

2. 성경: 두 아들(22-23절)

3. 해석 : 두 언약(24-27절)

4. 적용 : 약속의 자녀로 살라!(4:28-5:1)

율법과 복음의 논쟁은 갈라디아서 4장에 와서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논쟁의 결론은 분명하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되는 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해 왔다. 성경 이야기를 통해서 밝히고,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과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명백하게 설명했다. 이제 논쟁을 마칠 때가 왔다. 이야기 하나를 하면서 논쟁을 마친다. 이 방법은 당대의 탁월한 수사법이기도 하다.

오늘 바울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율법주의자들에게 진지한 질문을 하고,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어머니인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하게 된다. 바울은 이 두 어머니를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이것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권면을 한다.

먼저, 바울이 마지막으로 율법주의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1. 질문 :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1절)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이 질문의 대상은 “율법 아래에 있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즉 유대인과 유대적 율법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종교와 신앙은 율법적이다. 율법적이란 어떤 규칙과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체계이다. 오늘날에도 어떤 원칙과 규칙과 법칙을 지킴으로써 정통적인 신앙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 두 개를 예로 들었지만, 사실 이렇게 법 아래에 살려는 신앙인들은 의외로 참 많다. 교회 구조, 강대상, 예배 의식, 찬양대와 음악, 교회 직분과 제도, 신앙생활과 교회생활 등에서도 법과 전통 및 법칙성을 강조하면서 그 아래에서 살려고 하는 이들이 참 많다. 예를 든다면 강대 상이 둘이어야 하는가? 하나로도 괜찮은가? 는 논쟁도 계속되고 있다. 어느 교단에서는 여성이 강대상에 올라올 수 있느냐? 없느냐? 논쟁하고 있고, 여성 목사 안수는 해묵은 논쟁이고요, 찬송가 이외의 찬양을 주일예배 때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 논쟁도 하고 있고, 축도를 “.... 있을지어다”가 옳으냐? “.... 하기를 축원합니다”가 옳으냐? 논쟁하고 있고, 미국에서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에 그 동네 시장이 참석했을 때, 담임목사가 시장에게 축도를 부탁했고, 그 시장은 눈을 뜨고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축도했다. 물론 그 시장은 안수 받은 목사가 아니었다. 장애인의 날에는 장애인 중 한 명이 휠체어를 타고 강대상에 올라와 축도했다. 물론 그도 안수 받은 목사가 아니었다. 또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이단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이런 법 또는 법칙성, 헌법과 정통성을 논하면서 목숨 걸고 투쟁하는 모습을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렇게 교회법을 기준으로 경건과 정통의 모든 것을 가름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이다. 율법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바울은 질문한다.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달리 표현하면, “너희들이 율법 아래에 살려고 하느냐? 그렇다면, 율법을 바로 알라!” “너희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고자 하는 율법을 너희들이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느냐?”

대게 법칙과 전통을 법처럼 여기고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 법을 철저하게 배운 사람들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법과 전통에 대하여 더 철저하고 폭넓게 배웠다면 오히려 그 법과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 사람들은 어릴 때 조금 배운 것에 평생 종속되는 것 같다.

 

바울은 이렇게 “너희들이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질문한 것은 “너희들이 율법을 잘 알지 못하니, 내가 이제 율법의 참 의미를 알게 해 주겠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율법에 해당하는 오경 가운데서 처음 책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게 된다.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4: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이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창 16:15, 21:2).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는 해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몇 년이 흘러도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아내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제안했다. 자기의 여종 하갈과 함께 아들을 낳아 후사로 삼으라고 말이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이스마엘이다. 그런데 사라는 그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는 해에 아들을 낳게 된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이삭이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고 말하면서,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말 하는 것이다. 두 아들이삭과 이스마엘, 그리고 두 여자 자유 있는 여자와 여종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울의 해석을 들어 보자.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

 

4: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

바울은 두 어머니를 두 언약으로 비유하면서 해석하고 있다. 먼저 바울은 하갈을 시내 산 언약으로 비유한다. 시내산은 율법과 모세의 상징이다. 그런데 유대인들 입장에서 충격적인 것은 이 시내 산으로부터 ‘종’이 나왔다는 설명이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그 시내 산이 아라비아에 있음을 강조한다. 아라비아에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있지 아니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그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이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다는 설명이다. 요약하면 시내산과 율법과 모세와 예루살렘과 하갈과 종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들 입장에서 왜 충격인 해석이 될까?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사라를 통하여 태어난 이삭의 후손이며, 거룩한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거룩한 율법을 받았고, 예루살렘이라는 거룩한 도성에서 살고 있는 선택된 민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울이 시내 산이 이방 땅 아라비아에 위치해 있고 지금 유대인들이 여종인 하갈의 후손이라 하니 그 유대인들이 얼마나 황당할까?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