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진정한 자유 - 5장 1절

차작가 2024. 1. 12. 13:06

III. 적용 관련: 은혜와 그리스도인의 생활 (5–6장)

2003년 12월 22일 자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 Newsweek 지에 알리 Ali 라 불리는 이락 남자 이야기가 기사로 실렸었다. 21세 총각인 그는 한 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바그다드로 가고 있었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가는 곳이 매음굴이었다. 그가 매음을 위한 지불한 비용은 1불 50전이다. 알리는 기자에게 말했다. “사담 후세인이 통치할 때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이제 여자를 사는 것이 쉬워졌다. 그리고 값이 아주 싸졌다. 아주 좋아.” 후세인은 매춘과 알코올과 마약 등 사회악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면서 온갖 타락상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매춘뿐만 아니고 포르노 영화까지도 공공연하게 상영되는데 하루 종일 관람료는 70 센트이다. 새롭게 얻게 된 이러한 비도덕적인 일들을 언급하면서 알리는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드디어 우리는 자유를 갖게 되었다

1945년 일제 식민지가 끝났을 때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자유가 왔다!"라고 외쳤다. 이것은 정치적 자유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을 자본주로부터 해방시킨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유물론적 자유이다. 수출입 관세가 완화 또는 철폐되었을 때, “자유 무역의 시대가 왔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경제적 자유이다. 정치적 구호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홍보물 그리고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자유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이다.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한 장사행위들까지도 자유라는 간판을 밖에 걸어 놓는다. 그야말로 자유의 홍수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에서 자기의 사도권에 대해서 논증했고, 3장과 4장에서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인정받는 진리에 대해서 변증했는데, 이제 5장과 6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의 진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이어진다.

‘칭의’ 또는 ‘의인’(justification) - ‘의롭다 인정받음’의 진리는, ‘성화’(sanctification)의 생활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은, ‘자유’, ‘자유’라는 한 마디로 표현된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5:1-15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살펴보자.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유와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우리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A. 그리스도 안에서 속박이 아닌 자유 (5:1–15)

1. 자유(1절) 2. 성령(2절-6절) 3. 사랑(7절-15절)

성도들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다, 우리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성도라는 것을 자기의 신앙행위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은혜와 사랑에 대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 사람이 그만한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내세운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만한 신앙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인간 편에서 스스로 기준을 만들어서 그 기준에 미달할 때 신앙이 부족한 것으로 단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법에 매여 사는 모습이다.

신앙생활을 기쁨으로 즐거움을 하는 것이 아니고 법에 매여서 하는 것이다. 물론 법에 매인 신앙 생활에도 기쁨과 즐거움은 있다.

그러나 그 기쁨과 즐거움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기쁨이 아니고 신앙의 법을 지킨 자기 성취에 대한 기쁨이 만족임을 알아야 한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자유함에 대한 훈련보다는 신앙의 법에 대한 훈련이 너무 잘 되어있다. 그래서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성경 묵상을 조심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경 묵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성경 묵상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좋은 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신앙의 기준을 성취하기 위하여 묵상이라는 방법을 동원한다면 그것은 버려야 한다. 어떤 기준을 이루어보려고 하는 성도는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고 말할지라도 아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이와 같이 법에 의해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나아갈 때 그 교회는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 획일화된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법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나 법에 의해서 신앙 생활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신앙 생활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고 싶어서하는 일이 되어야한다. 그것이 자유자로 사는 것이다.

성경, 해석: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 어떤 법도 효력이 없다는 의미이다(6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그 자유를 살펴보자.

구원은 해방이다. 구원받기 전 우리는 ‘종’이었다. 죄의 종이었다. 죄를 범하면, 죄에게 예속된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한 번 떠나게 되면, 저절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셔야, 우리가 자유롭게 된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 우리라!”(요 8:36)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이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식과 내용은 ‘자유’이다.

적용:

자유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부자유' 또는 '예속’일까? ‘포로’ 또는 ‘투옥’일까?

일리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자유’의 반대말은 ‘죽음’이다.

생명은 자유이며, 자유가 곧 생명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생명을 주신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자유롭게 사는 것은,

사는 것처럼, 생명처럼, 산다는 의미이다.

율법적으로 사는 것은, 겉으로는 산 것 같지만, 속으로는 죽음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자유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율법 안에 갇혀 살도록 유혹하는 자들이 있다. 은혜와 율법을 섞을 수 없지만, 은혜 위에 율법을 보충하라고 가르치는 자들이다. 우리가 곧 경계해야 할 자들이다.

우리가 자유를 바로 안다면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생명안에 사는 것을 즐길 수 있다.

절대로 죽음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