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사랑 - 갈라디아서 5장 7~15절

차작가 2024. 1. 16. 11:59

A. 그리스도 안에서 속박이 아닌 자유 (5:1–15)

1. 자유(1절) 2. 성령(2절-6절) 3. 사랑(7절-15절)

갈라디아서 5장 후반부에서 더욱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교회는 천국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천국은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교회도 사랑이 있을 때 천국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교회의 사랑이란 친절이 아니다. 사람을 친절하게 대한다고 해서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교회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법이 아니라 용서였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인다는 것은 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교회는 가정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가정 또한 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내가 받는 것이 있어야 베풀려고 하고, 또 조건 없이 베푼다고 해도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서 베풀려고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또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서 자기 몸을 내어 놓으셨다. 이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들이다. 우리 한 사람이 이 주님의 사랑을 이해한 가운데 그 모습을 교회에서 보인다면 그 교회가 바로 천국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 그 ‘자유’ 안에서 살 수 있게 하시는 이는,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살게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가 사랑이 아니라, 율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항상 있다.

그들은, 6가지 특징이 있다.

성경, 해석: (7-15) 사랑

5: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첫째, 7절을 보면,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 그들은, 진리를 방해하는 사람들이다.

 

5: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둘째, 8절을 보면,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그들의 가르침, 율법으로 살라는 가르침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셋째, 9절을 보면,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 그들은 교회를 오염시킨다.

 

5: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

넷째, 10절을 보면,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 그들은 결국 심판을 받게 된다.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오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다섯째, 11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오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 그들은 은혜와 자유를 가르치는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의 은혜가 걸림돌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진리 -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이 걸림돌인 것이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가르치는 사람을 박해하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5: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여섯째, 12절을 보면,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율법주의자들은, 베어버림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어떠할까?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우리의 부르심은 여러 가지나, 그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 곧 자유이다. 그런데,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바로, 육체적 자유이다. 이 세상의 자유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데, 세상적 자유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세상적 자유는, “나 홀로” 있기 원하는 자유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개인적, 사회적, 심리적 자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이루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 자유로 이기적으로 살아서도 안된다. 그 자유로 쾌락을 추구해서도 안된다. 그 자유로 죄에게 중독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종’의 형태를 입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에 대하여 자유를 누리고 있을 때, 우리는 서로와의 관계에서 ‘종’이 된다.

이것은 의존적 관계 - 종속관계가 아니다. 서로 자유하면서, 서로 종노릇하는 것 - 독립된 인격으로서, 서로 섬기는 것이다.

성령이 계시는 곳은 자유하고, 자유한 사람이 사랑할 수 있다.

자유하지 못한 사랑 - 이것은 노예적 사랑, 사랑의 학대, 사랑의 남용이다.

자유하지 못한 사랑 - 이것이 의존적 관계 - 종속적 관계이다.

자유하지 못한 사랑 - co-dependence 이다.

 

한편, 사랑 없는 자유 - 이것은 방종이다.

사랑 없는 자유 - 이것은 파괴, 무질서, 폭력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 inter-dependence

세상적 자유 - in-dependence 이거나 co-dependence 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묶여있을 때 진정으로 자유해진다. 우리가 이 세상의 힘에 묶여 있을 때, 우리는 종이 되는 것이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너 자신같이 하라” - 이 한 말씀에서 성취되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뜻이다.

사랑 없는 정의는 율법주의이다.

사랑 없는 믿음은 이데올로기이다.

사랑 없는 희망은 자기중심성이다.

사랑 없는 용서는 자기 비하이다.

사랑 없는 용기는 무모함이다.

사랑 없는 구제는 낭비이다.

사랑 없는 돌봄은 단순한 의무이다.

사랑 없는 충성은 노예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덕목 -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 - 모든 말씀은 - 사랑의 표현이다. 그 어떤 말씀, 그 어떤 행위도, 그 어떤 덕목도,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자기 의의 행동이거나, 자기 연민이거나, 자기 비하이다.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적용:

율법은 우리의 마음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지 착각일 뿐이다.

오직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 가능하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할 때, 죄로부터 자유할 때, 시작된다.

이제 자유를 누려야 할 때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참 자유한 사람인 것이다.

자유 * 성령 * 사랑 - 이 세 가지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제,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세상에 참 자유를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