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 - 갈라디아서 5장 16~18절

차작가 2024. 1. 16. 12:01

바울은 자유자로 신앙 생활하라고 하면서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한다(13절). 즉 자유라고 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는 의미이다. 그 자유가 남에게 해가 될 때는 내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유의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즉 '사랑으로서 종노릇 하는 것'(13절)이다. 자유란 사랑에 의해서 움직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랑이 자유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 우상 제물의 문제에서 제물을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가 있었다. 이때 바울은 우상 제물이 죄냐 죄가 아니냐를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신앙의 지식으로 인해서 자유함을 가지고 거리낌 없이 우상 제물을 먹는 자들에게 신앙의 지식이 없는 자들을 위해서 그 자유를 절제하라고 한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 계속되는 ‘나와 또 다른 나와의 싸움’의 현실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그 싸움을 완전하게 승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함께 들었으면 한다.

바울은 내 안에 있는 두 개의 나의 싸움, 달리 표현하면 나와 또 다른 나의 싸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16-18절)

성경, 해석: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바울은 성령과 육체의 갈등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성령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한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다른 나, 즉 옛 모습으로서의 나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한다. 이렇게 내 안에 있는 나, 즉 성령과 싸우는 나를 바울은 ‘육체’(flesh) 라고 불렀다. 이 육체는 팔, 다리 등에 붙은 ‘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뜻과 서로 원수처럼 싸우는 ‘나’를 의미한다.

 

성령에 인도되는 삶은 성령과 육체의 갈등이 계속되는 삶이다. 성령에 인도되지 않는 삶은 갈등도 없다. 그러나 성령에 인도되는 삶은 옛날 방법과 옛날 습관과 옛날 성품과 끊임없이 싸우는 삶이다.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는 전쟁이다. 수십 년 계속되는 내란이다.

 

성령의 편, 즉 하나님 편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성령의 좇아가는 사람이다. 성령을 좇는다는 말은 법이나 어떤 규칙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알고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온통 내 기쁨을 위해서 살아간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뭘 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다. 때문에 우리의 삶들은 온통 내 기쁨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이지 내 기쁨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겠다는 믿음은 아예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하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이다. 내 욕심을 따라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간들의 본성이다. 자기의 욕심에 의해서 모든 삶이 움직여진다. 그런데 이것을 못하도록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다. 육신으로는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성령이 내 안에서 거부한다. 내 힘으로는 거스릴 수 없는 것을 성령이 내 안에서 거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싸움이고 갈등이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절) 바울 사도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로마서 7장 19절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러한 갈등과 분열의 삶, 그리고 싸움과 혼돈의 삶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방법이 무엇일까? 사람들은 ‘율법’을 만들어 구원받으려 했다.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 이러한 율법을 만들고 지키면 살인과 거짓과 도둑질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내 안에 있는 두 개의 나’가 더 심하게 싸우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살인하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는 살인을 부추 긴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는 거짓말을 하도록 유혹한다. 다른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성령 안에 있으면서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 하는 노력은 수포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8절의 말씀은 이렇게 분명하게 선포한다.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율법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도 없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의롭다 인정을 받는데 아무 소용이 없다. 한 마디로 율법은 ‘칭의’ 또는 ‘의인’(Justification)에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율법은 사람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능력’도 없다. 한 마디로 율법은 그리스도인의 ‘성화’(Sanctification)에도 아무 효력이 없다. 즉 율법은 청의와 성화에 아무 효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칭의(Justification)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성화(Sanctification)을 위해서도 율법과 은혜는 서로 조화될 수 없고, 서로 절충될 수 없고, 서로 혼합될 수 없고, 서로 혼용될 수 없다.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갈 수도 없거니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 수도 없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 수도 없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의 기준을 말해주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폭로해 준다. 그래서 우리의 노력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이러한 방법으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해 주는 ‘몽학선생’이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율법 스스로가 말하고 있을 뿐이다.

 

“구원을 위해서 율법의 역할이 끝났다"라는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성화를 위해서는 율법의 역할이 아직 남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다! 성화를 위해서도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율법이 삶의 안내자가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안내자는 성령께서 하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내가 율법의 법칙들과 규칙들을 기준 삼아서 거룩하게 살기 위하여 자신을 다스리고 수양하면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을 질식시키고 소멸시키게 된다. 그 노력이 아무리 고상하게 포현될지라도 말이다. 성경공부, 기도, 새벽 기도, 철야 기도, 예배, 헌금, 전도, 봉사 등... 교회의 어떤 행동 규정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해야 하고, 또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교회 활동에 얼마나 자주, 얼마나 열심히 참여하는가? 이것이 나의 영성과 믿음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그러한 것들, 성경공부, 기도, 예배, 전도, 헌금, 봉사 - 등을 영성의 척도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의 올무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행동들은 외적으로, 가시적으로, 인간적으로 측량할 수 있다는 정도의 의미 밖에는 없다. 이러한 행동들이 내적으로, 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방법이나 척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율법을 삶의 기준 삼아 산다는 것은, 자기의(自己義)와 위선 안에서 육체에 의하여 사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성령을 억압한다. 율법의 열매는 사망이다. 율법의 열매는 위선이다. 율법의 열매는 자기 기만과 자기 갈등이다. 율법의 열매는 육체적 욕망과 교만이다. 오직 성령만이 내적으로 진정한 의의 열매를 내 안에 생산해 낸다. 거룩함은 오직 성령으로부터 만 온다.

 

적용:

우리는 스스로에게 내가 누구 편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성령을 좇지 않는 자는 하나님 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기편으로 살아갈 뿐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편으로 사는 자의 하나님이시지 자기편에서 사는 자의 하나님은 아니다. 시편 118:6,7을 보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나를 돕는 자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여호와가 내 편이라는 것은 이 시의 저자가 이미 여호와의 편이 되어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편으로 사는 자는 이미 자기의 기쁨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는 이런 자를 돕는다는 것이다. 그 도움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오셔서 모든 문제를 사라지게 하는 도움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에서도 원수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시는 도움을 말하는 것이다.

정말 나는 하나님 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성령을 좇아살아 가고 있을까? 우리의 예배와 기도와 설교 듣는 것이 우리의 삶에 기쁨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이 있나? 스스로 확인해 봐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이런 싸움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나? 그 싸움 속에서 나의의 것을 조금씩 포기해가는 모습이 있나? 그런 싸움이 있음으로 기뻐하시고 언제나 하나님 편으로 자신을 던져야 한다.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 하나님 편으로 서고 싶은 자기의 소원을 아뢰며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편으로 사는 것이고 성령을 좇는 삶이다. 하나님께 대해서갈급함 마음이 되기를구해야 한다. 세상에 대한 갈급한 마음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갈급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먼저 이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일의 결정을 내가 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편에 서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내가 하나님께 기쁨이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늘 찾아가며 성령을 따라살고 여호와의 종으로 세상을 살아가길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