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성령의 일 - 갈라디아서 5장 16~25절

차작가 2024. 1. 16. 12:03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당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행한다고 해서, 그러한 행동들이 거룩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거룩한 삶은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무엇을 행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율법의 세트를 지키면서 거룩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과 무지의 결과이다. 율법이 아닌 성령이 당신을 거룩하게 만든다.

 

바울은 율법이 사람을 구원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선언한 다음, 이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로 서로 대비시키면서 설명한다. 바울은 육체의 행위들을 이렇게 열거한다. (19-21)

갈라디아에서는 육체의 행위와 율법의 행위는 같다고 말한다. 따라서 19절부터 21절까지의 육체의 일은 곧 율법의 일이다. 달리 말하면 율법적으로 살려고 할 때 결과적으로 발생되는 현상들이다. 즉, 율법적으로 살려고 할 때 이러한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설명한다.

 

여기에 열거된 육체의 일, 즉 율법적 생활의 열매는 네 분야로 나누어진다.

즉, 성, 윤리와 종교, 대인관계, 그리고 중독 현상 이렇게 네 분야이다.

성경, 해석: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1) 19절의 “음행, 더러운 것, 호색”은 성 윤리에 관한 것이다. 음행과 더러운 것, 호색을 금하라는 율법을 아무리 지키려고 노력해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 그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율법의 이러한 사슬에 더욱더 얽매이게 된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우리의 성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의 성품은 오히려 더 율법적이 된다 율법적인 동기와 목적으로 성 윤리의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그 열매는 처음 동기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성적 타락이라는 육체적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5: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 20절의, “우상숭배, 주술”은 종교에 관한 것이다. 우상숭배와 주술도 육체의 열매이다. 율법으로 금한다고 해서 우상숭배와 주술을 버리지 못한다. 금기와 율법으로는 바른 신앙을 세울 수 없다. 한편, 만약 복과 화의 공식인 율법에 의해서 기독교를 믿는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주술과 마찬가지이다. 율법으로 시작하면 율법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율법적인 기독교는 우상숭배와 주술과 같은 육체적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3) 20절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열함과 이단, 투기" - 이렇게 여덟 가지는 대인관계의 장애를 말한다. 율법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대인관계의 장애의 증후들이 나타난다. 율법적으로 가르치고, 율법적으로 믿고, 율법적으로 사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 등등의 육체적 열매를 맺게 된다. 율법적인 사고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하기 일쑤이다. 그리고 자기의 의와 공로를 자랑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적인 사람들이 육체적인 열매를 맺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육적인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율법적으로 산다는 증거이다.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오"

4) 술 취함, 방탕함, 그와 같은 것들 - 이러한 것들은, 중독 현상에 관한 것이다. 술, 도박, 마약 등 그 어떤 물질이나 관계에 대한 중독 현상들은 율법적 생활의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모든 것은 아니지만... 거식증이나 폭식증 같은 중독 현상이나, 다른 중독 현상이 ‘사랑 결핍증’이라는 보고들이 많이 있다. 이렇게 사랑 결핍증으로 발발한 중독 현상들은 사랑을 충분히 부어 주어야 치료와 회복이 되는 것이지, 율법적 훈련, 또는 종교적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성적 타락, 종교적 타락, 대인관계의 장애, 그리고 중독 현상은 성령이 아닌 육체의 힘으로, 은혜의 힘이 아닌 율법의 힘으로 살아갈 때 생기는 현상과 열매인 것이다.

 

육체의 일, 즉 율법의 행위가 이렇다면 성령의 일, 즉 성령의 열매는 무엇일까?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5: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2절과 23절에 있는 ‘성령의 열매’는 세 개의 삼화음(three triads)으로 설명된다. 첫째 삼화음, 즉 사랑과 기쁨과 화평의 화음은 하나님을 향한 삼화음이다. 둘째 삼화음, 즉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의 화음은 이웃을 향한 삼화음이다. 오래 참는 것은 성숙한 성품의 꽃이다. 양선은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을 말한다. 그리고 셋째 삼화음, 즉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화음은 자신을 향한 삼화음이다. 충성은 성실을 말하고, 온유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허한 부드러움이다. 충성과 온유는 절제의 양면이다.

 

이러한 열매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고 했다. 왜냐하면, 율법의 기능은 제갈 물리고, 제한하고, 통제하고, 억제하는 것인데,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율법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훈련과 교육이 우리 사회 문제의 해결책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통하지만 대게는 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회적, 또는 개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나 새로운 테크닉을 도입하려고 하지만, 그것들은 별로 통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새로운 능력을 받아들여야 우리의 옛 성품이 변하고, 또 안팎에서 몰려오는 유혹들을 물리칠 수 있다. 새로운 능력은 율법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새로운 능력은 오직 성령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새롭게 살려고 노력한다. 나의 의로운 생활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인정해 주신다는 진리를 믿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들과 딸로서 담대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다음! 거룩해지고 싶을 때, 성화를 이루고 싶을 때, 그때, 율법적 방법과 율법적 사고를 도입한다면, 그것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행위가 된다.

이 진리를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곳에 적용할 수 있다.

첫째, 가정에서 이 진리를 적용할 수 있다. 부부 관계와 자녀교육, 그리고 부모 사랑에 있어, 무엇을 하고 가르치든지, 또 무엇을 주고 받든지, 그것이 율법적이라면, 즉 그 동기와 행동이 율법적이라면 거기에는 육체의 결과가 일어납니다.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열함과 이단, 투기 등등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오직 성령의 힘과 은혜로 해야 합니다. 은혜적 동기와 행동으로 하고, 무엇을 하든지 자유와 복음 안에서 해야, 거기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둘째, 교회에서 이 진리를 적용할 수 있다. 주일예배, 기도, 성경공부, 헌금, 봉사, 기타 등등.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가르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이 율법적이면, 즉 그 동기가 율법적인 생각과 행동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헌신적일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열정적일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큰 정성일지라도, 그것은 육체의 결과만 낳게 된다. 기쁨도 없고 화평도 없다. 여기에 참 거룩이 없다. 오직 성령의 힘으로 해야, 자유와 은혜 안에서 해야,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셋째, 사회와 직장에서 이 진리를 적용할 수 있다. 타율적인 사회는 결국 무질서와 혼란을 낳고 만다. 자유와 그 책임을 알고, 그 자유와 책임의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실천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이다. 성숙한 사회가 평화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등, 이 사회의 모든 영역과 분야에서 자유와 책임을 더 많이 강조해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 안에 육체와 성령의 갈등, 율법과 은혜의 싸움이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육체의 일들 즉 율법의 열매들을 살펴보았고, 그 후 성령의 열매를 살펴보았다. 이제 남아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육체의 일들과 성령의 일들 사이의 싸움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가?”이다.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이다. 이 말씀은 ”율법의 종교가 끝났다!"라는 선언이다. 율법의 저주가 끝났다! 율법의 사슬이 끊어졌다! “육체의 정욕과 탐심 - 즉 자기의(self-righteousness)와 교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는 선언이다. 이제는 자유와 사랑의 길이 열렸다! 이제는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자유와 성령과 사랑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완전한 승리요 궁극적인 승리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Piligrim's Progress)에서 순례자가 여행을 계속하다가 천성의 도성에 들어가게 된다. 순례자는 거기서 ‘해석자의 집’(Interpreter's House)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집의 현관이 온통 다 먼지로 뒤덮여 있다. 그래서 순례자는 빗자루를 들고 쓸기 시작한다. 그랬더니 순례자는 물론이고 그 방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빗자루질 할 때마다 먼지가 숨이 막힐 정도로 엄청나게 날아오르기 때문이다. 순례자가 비질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먼지는 더 많이 날아오른다. 이제 해석자가 하인에게 명령한다. “물을 가져와서 그 물로 방을 씻으라!” 하인이 물을 가져와 방을 씻으니, 먼지가 금방 씻겨 내려간다. 방이 깨끗해졌다. 해석자가 순례자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집의 현관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마음이고 먼지는 죄이다. 빗자루를 들고 있는 사람은 율법이고 물로 씻는 하인은 복음이다.“ “율법은 죄를 날아오르게 만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죄를 씻어 없애 준다.”

 

적용:

이제 성령에 따라 살자! 성령님을 더 많이 사모하고, 성령님과 더 친하게 지내시고, 성령님의 능력을 더 많이 받고, 성령님의 안내를 계속 더 많이 받길 소망한다. 이것이 성령에 따라 사는 것이다. 성령에 따라 살면 성령의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히게 되어있다. 성령의 햇빛과 성령의 물과 성령의 에너지가 공급되면,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것이 율법과 육체를 물리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승리이다.

 

나의 성품과 생활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많이 열리기를, 성령의 큰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기를 기도한다.

첫째,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조상들의 믿음이나 선한 생활 때문도 아니고, 당신 자신의 선한 생활이나 의로운 생활 때문도 아닌 것을 확실하게 믿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둘째, 나는 지금 하고 있는 교회생활 - 예배, 성경공부, 기도, 헌신, 봉사 등 - 그것들은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그 교회 생활이 나의 믿음이나 영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교회 생활은 믿음과 영성의 외적이며 가시적인 척도일 뿐이다. 더 본질적인 척도는 나의 마음과 생활 속에 성령의 열매가 얼마나 맛있게, 얼마나 많이 열리는가? 이다. 나의 교회생활과 가정생활, 그리고 이웃들과 성도들과의 관계를 율법적 관계로부터 은혜적 관계로 전환시켜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관계’라는 나무에 맺히는 열매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율법적으로 살면서, 즉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겠다거나 복을 받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율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또는 어떤 교회생활의 규칙을 어겼을 때, 어떠한 벌, 어떠한 화, 어떠한 사고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해야 한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율법의 열매 즉 육체의 열매가 맺힌다. 율법으로, 즉 율법을 지킴으로써 나는 거룩하게 변화될 수 없다.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살았고, 또 현재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성령의 힘에 의해서 살아야 함을 오늘 말씀을 통해 기억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