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 아니라 은혜! 우리는 이 진리가 단지 교리적 차원에 머물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이 진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이다. 구원도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성화도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우리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결정하는 것도 은혜여야 한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 이 진리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의 체질이며 그 관계의 코드이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 이 진리는 그리스도인의 가치, 윤리, 문화, 습관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사회의 윤리와 관습과 전통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살게 되었고 또 은혜로 살고 있다. 은혜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로부터 출발하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랑이라는 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이 아니고, 사랑의 법이며, 즉 그리스도의 법이다. 이 사랑의 법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서로 짐을 지라’이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6장 1절-10절을 통해서 ‘서로 짐을 지라’는 이 ‘사랑의 법’을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려 한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구절과 구절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서로 짐을 지라는 개념이 공통분모인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자유인으로서 이 사랑의 법을 알고, 또 이 사랑의 법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이다.
공동체 생활을 위한 조언 (1-5)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 또는 화려한 행동, 또는 멋진 행동이 아니다. 사랑의 법은 서로의 짐을 지는 행동이다. ‘짐을 지는 행위’는 ‘종’ 또는 ‘아랫사람’의 의무이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종의 행위인 ‘짐 지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설명한다.
성경, 해석: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라는 것은 범죄가 시험으로 인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시험을 받지 아니한다면 범죄가 없다. 범죄가 없다는 것은 죄가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의 열매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죄의 본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본성에 의한 열매가 시험으로 인해서 열매로서 보이게 되는 것을 범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내부에는 언제나 육체의 일을 따르고 싶어 하는 흔들거림이 있다. 그 흔들거림이 평소에는 자신의 억누름에 의해서 외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떤 시험이나 유혹이 미쳤을 때 평소의 흔들거림 들이 실제 행동화되어서 외부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범죄가 없을 수 없다. 교회는 신자가 모이는 곳이니까 모두가 깨끗하고 선하고 싸움도 없고 다툼도 없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교회는 죄가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죄가 용서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 한 번으로 끝난 용서가 아니라 교회로 모일 때마다 용서 아래 모이는 것이다. 죄를 무조건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모여드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이다.
그런데 교회 내에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보다는 육체의 일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교회 내에서 범죄 함을 보이는 것이다.
이럴 때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1절에 보면 그러한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라'고 말하고 있다. 즉 교회는 범죄 한 자를 위해서 신령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신령한 사람이 범죄 한 사람에게 죄에 대한 권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교회에서 범죄 한 자에 대한 처리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흔히 신자는 교회는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는 나를 위해서 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가 신령한 신자, 즉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주님만을 사랑하고 성령으로 살기를 힘쓰는 신자가 왜 필요하느냐면 시험과 유혹에 의해서 범죄 한 형제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신령한 신자는 하나도 없고 모두가 범죄 함만 보이고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면 어떻게 될까? 누구 하나 죄를 지적하고 권유할 사람이 없어지고, 또 이웃의 신앙 생활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 모습으로 되어 가기 때문에 결국 교회는 교회가 아닌 교회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신령한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고자 애를 쓴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그리스도의 정신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사랑과 섬김이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다. 이 모습이 짐을 서로 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
6: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26절 “헛된 영광을 구하는 행위, 즉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강압적으로 대하고,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투기하는 행위” - 이것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짐을 들어주지 않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이 나의 짐을 들어 줄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내가 무엇인가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I am something! -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We are not 'something'; we are 'nothing'.
We can not do 'something'; we can do 'nothing'.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nothing”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4절,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의 의미입니다.
자기가 nothing 이라는 사실을 살피는 것이, ‘자랑할 만하다’ 즉,
‘권장할 만한 일이다’는 뜻이다.
그래서, 5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 자기의 짐을 지는 사람이 서로의 짐을 질 수 있다.
자기의 짐을 지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짐을 질 수 없다.
6: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자랑이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결과이다. 남이 나에게 한 일을 나의 자랑으로 삼을 수는 없다. 따라서 4절의 말씀은 일한 것을 자랑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랑이되는 신자는 언제나 이웃을 위해서 자기 할 일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5절에서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6: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사는 사람들’이다.
‘함께 살기 싫어하거나, 함께 사는데 어려움을 느끼거나, 함께 살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 은 다시 말하면, 공동체를 거부하고, 개인적 영성/개인적 신앙/개인적 믿음만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반쪽 밖에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짐을 질수 있는’ 모임에 속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서로의 짐을 질 수 있는 범위 안으로 가까이 가는 것이다.
적용:
바울은,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로 하루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가이드라인을 이렇게 제시했다.
“서로의 짐을 지라”
그다음에,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이웃과 공동체로 확대시켰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어떤 역할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유라는 것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이다. 교회는 몽땅 내가 이웃에게 할 일만 있지 이웃이 나에게 해줄 일은 없다. 그래서 4절에서 우리의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두지 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우리의 지체에게로 돌려주길 바란다. 지체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언제나 생각하길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신령한 모습이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삶이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정신이 충만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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