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할례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차작가 2024. 1. 18. 11:40

종교 개혁가에게 갈라디아서는 ‘전쟁 선포문’ 또는 ‘그리스도인의 독립선언문’이라고 불렸다.

 

여러분은 과연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서 ‘영적 해방감’을 경험하고 지금 ‘영적 자유’를 누리고 계시나요? 이 책이 전쟁 선포문이라면 여러분은 이 갈라디아서와 함께 율법과 전쟁을 하고 계시나요? 이제까지 익숙해진 율법적 습관과 내적 전쟁을 치르고 계신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율법을 주장하는 다른 사람들과 외적인 전쟁을 하고 계신다면 또 앞으로 할 것이지만 주께서 이기게 해주실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이제 ‘독립선언문’으로 ‘선언’하십시오. 그래서 이제는 율법과 종교와 악에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이젠 ‘자유’입니다. 다시 종의 멍에를 매지 마십시오.

성경에 기록된 주제와 내용을 갖고 설교한다고 해서 모두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으로 설교를 할지라도 종교적이며 율법적이며 도덕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하실 것을 기대하고 내가 무엇을 한다, 이 공식으로 권면하거나 위로하거나 훈계하거나 경고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그 안에 아무리 현란한 수사학이 있어 우리를 감동시킬지라도 율법적이며 종교적인 교훈에 불과하다. 그래서 성경적이라 할 수 없다.

성경적이라는 의미는 구약에 창세기로부터 신약에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본문을 해석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구원, 그리스도의 은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관점으로 재해석할 때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갈라디아서의 결론 또는 후기에 해당되는 본문 6장 11절~18절까지를 읽으면서 갈라디아서 말씀을 요약하면서 정리하고자 한다.

 

1. 유대주의자들의 이기적 목적 (11-13)

 

성경, 해석: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바울은 마지막 부분을 큰 글자로 쓴다. 큰 글자로 쓰는 것은 강조하기 위해서다. 오늘 우리가 빨간펜이나 형광펜으로 밑줄 긋는 것과 똑같다. 구약성경을 히브리어 원문이 기록된 사본을 읽어보면 몇 가지 글자가 아주 크다. 그 이유는 그것을 필사하는 서기관이 어떤 한 글자와 단어를 크게 쓰면서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한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도 강조하고 싶은 글자를 큰 글자로 쓰는 것이다. 그것은 12절과 13절을 강조하고 있다.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

6: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이것을 큰 글자로 썼다.

“율법주의자들은 육체를 자랑하고 있다. 너희들은 육체를 자랑하지 말라” 이것을 큰 글자로 강조하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아, 할례를 받으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완성된다.” “십자가를 믿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를 믿으라. 그러나 동시에 율법도 지켜라. 그리하면 구원이 완성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면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율법을 다 지킨다고 착각했다. 착각이거나 또는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동기는 육체를 자랑하기 위함이었다.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강조하는 이유는 육체를 자랑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자기 의’ ‘자기가 의롭다 하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무엇을 지킴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이것저것을 행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국 ‘나의 의’ ‘나의 공로’ ‘나의 도덕성과 행위’를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을 ‘육체의 공로’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경고했다. 이사야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시면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도다.” 마가복음 7장 6~7 절이다.

 

율법적인 신앙은 ‘외식’이다.

율법적 신앙은 사람의 계명을 교훈으로 삼는 것이고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다. 율법적으로 예배하는 것은 아무리 예배해도 헛되다는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열심, 여러분의 헌신, 여러분의 봉사, 여러분의 인내 결국 헛되다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율법적으로 하면 모든 것이 헛됩니다. 은혜로 해야 복음적으로 해야 참 진리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큰 글자로 쓰면서 강조했습니다. 율법을 강조하는 것은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라고요. 그러니 육체를 자랑하지 말라. 더 이상 자기 의를 자랑하지 말라. 그러면 무엇을 자랑해야 합니까?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2. 바울의 유일한 자랑 (14-18)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내가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못 박히고 나도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내가 죽었다. 탐욕과 교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더 갖고 싶은 욕망, 더 높아지려는 교만 다 죽었다. 그 말입니다.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겠다. 그런 고백입니다.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할례를 받는 것이나 할례를 받지 아니하는 것이나 다 외적인 것입니다. 형식적인 것이고 종교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nothing'

 

우리가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형식적인 것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배도 마찬가지고요. 찬송도 그렇고요. 봉사도 그렇고요. 선교와 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적으로 형식적으로 율법적으로 하는 것은 nothing입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새 창조’ ‘new creation'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새롭게 지음을 받습니다. 율법 안에 있으면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율법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시작된 이래로 율법은 항상 있어왔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율법적입니다. 율법이 새롭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율법은 우리를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새롭게 한다고 주장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율법적으로는 성장도 안 되고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안에서, 복음 안에서만 변화하고 성장이 일어납니다.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 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히 있을지어다 "

할례를 받는 것이나 할례를 받지 아니하는 것이나 다 외적인 것이다. 형식적인 것이고 종교적인 것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nothing'

 

우리가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형식적인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새롭게 지음을 받는다.

율법적으로는 성장도 안 되고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안에서, 복음 안에서만 변화하고 성장이 일어난다.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 예수님의 흔적이 무엇일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15장 23절 이후에 이렇게 고백한다.

 

11:23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 왜 이러한 고난을 받았을까?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만을 전했기 때문이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 율법이 아니라 십자가만을 전했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받았고 그 고통의 흔적이 몸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러한 고난, 고문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십자가를 계속 전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고 십자가의 사랑이다.

 

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

바울은 갈라디아서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은혜가 있기를 원하노라고 인사했다. 이 인사를 하자마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라고 질책했다. “너희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그렇게 빨리 떠날 수 있느냐” 그리고 율법과 은혜에 대한 글을 다 쓴 후에 마지막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고 마치게 된다. 이것이 축복이다. 이 축복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는 축복이 되어야 한다.

 

적용:

이제 갈라디아서를 마칩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또 이 사회에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교회의 예배와 봉사에도, 찬송과 기도에도, 교육과 선교에도, 모든 곳에 주님의 성도가 있는 곳에 주님의 성도가 가는 곳마다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심령에 우리의 말과 행동에 우리의 가치관에 우리의 습관에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우리나라의 윤리와 도덕에도 관습과 법에도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우리 민족의 전통과 관습에도 이제 우리의 미래의 후손들이 우리 민족의 얼을 이야기 할 때도 그 안에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우리부터 새로운 역사를 써가길 소망한다. 이제부터 은혜의, 복음의 증인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