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후의 반박이 32장에서 37장까지 끝나고 드디어 38장에서 41장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된다.
그리고 42장에서 결론을 맺는다
38장에서 욥이 그렇게 하나님을 대면하기 기다렸는데 하나님이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38:2-3)
나만 그런지 이 하나님의 첫 마디가 왜 이렇게 웃긴지 모르겠다.
폭풍우 가운데서 오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귀함과 엄위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2절에서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는 책망하는 말로 시작한다.
실상을 가리고 있는 욥의 변론을 책망라시는 것이다.
내 생각에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신다면
" 욥아 네가 당하는 고통을 다 보았다. 이제 때가 되어 답변을 하마" 이럴 줄 알았는데
그동안 많은 논쟁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기보다는 진리를 가렸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서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서서 하나님이 질문을 하면 대장부처럼 대답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오히려 답변을 하기 보다 하나님은 질문을 하며 돼 묻는 것이다.
그 질문은 하나님이 땅에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라는 뜬금없는 질문을 하시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것 또 자연의 이치 자연의 신비에 대해서 네가 얼마나 알고 있느냐를 물으신다.
재밌는 질문 중에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 그 먹이를 마련하시는 이가 누구냐라는 질문과
들소를 줄로 매어서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는 등 이런 자연의 신비와 동물의 섭리 등을 무려 38장에서 39장까지 이야기를 하신다.
여기서 나는 상상을 하며 읽으니 너무 재미있었다.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와 욥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고 하나님은 자신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욥을 일어나라 하시고 허리를 묶고 대장부처럼 서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이 장면을 상상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놀다가 다툼이 일어났을 때 아빠가 그 광경을 몰래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서 기죽어 있는 자기의 자식을 향하여
"너 왜 이렇게 기죽어서 있는 거야? 똑바로 서! 넌 내 새끼야! 그리고 아빠가 말하는데 똑바로 대답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친구들 앞에서 아빠가 어떠한 존재이고 얼마나 힘 있는 존재인지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의 아들에게 너의 아빠는 바로 이런 사람이야!
허리를 곧게 펴고 대장부처럼 서있으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나는 너한테 누구지? 하고 돼 묻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나는 하나님 자신을 소개하는 이 말씀이 나는 너의 아버지야! 기죽지 마! 내가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인지 알겠지?
이런 내가 너의 아버지란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연의 섭리를 설명하실 때 나는 방긋방긋하면서 신나게 읽었다.
마음속으로 "와! 하나님 정말 대단하시다. 이렇게 만드셨구나!" 이런 마음이었다.
또 까마귀 새끼가 배고파서 부르짖는 것도 보시고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은 당연히 나에게도 주신다는 신뢰감과 믿음이 더해졌다.
또 들소가 이랑을 가는 것도 상상하니까 너무 웃겼다.
40장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 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40:2-4)
욥의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니 여기부터는 내 이름을 넣어서 읽었다.
트집 잡는 조앤아! 나랑 다투겠느냐? 조앤아 나를 탓하는 것이니? 대답해 봐라! 이렇게 읽어 보니까 욥처럼 나도 할 말이 없었다.
욥처럼 이렇게 광활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하며 입을 가릴 뿐이었다.
기가 죽어 있는 욥에게 하나님은 다시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하시며 마음속으로는 기죽지 말고 똑바로 서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은 8절에서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40:8-9절 전반)
하나님은 욥에게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해서 모두 낮추라고 하신다.
즉 서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모두 교만해졌고 자신의 본질을 보지 못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네가 인정하리라 하셨다.
그러나 욥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리워야단" 존재에 대해서 설명하신다.
이것은 사탄을 상징하는 말씀이다. 리워야단이 어떻게 너에게 계속 간청하고 부드럽게 말하며 또한 리워야단과 네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존재도 하나님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하에 컨트롤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존재는 세상에 있는 존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운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말하며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이 세상천지 만물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움직이고 심지어 하잘것없어 보이는 풀 한 포기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이렇게 리워야단과 같은 두려움의 존재도 하나님이 지으셨고 통치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즉 고난을 해결할 수 없는 너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하찮은 욥의 고난을 보셨고 또 욥과 대면하러 오신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상황 앞에 욥은 할 말이 없게 된다.
그런 욥은 하나님께 회개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은 못 이루실 것이 없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하나님과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이어간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42:4-6)
그동안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뵙고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진심으로 회개하게 된다.
하나님은 욥의 깨달음을 기뻐하셨고 자신의 자녀를 똑바로 세워 자신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려 주셨다.
그리고 무너져 있던 자존감을 세워 주신다.
하나님은 세 친구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욥은 옳다고 세워주셨다.
마치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싸울 때 아버지가 와서 자신의 자녀를 그 자리에서 일으키시고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말씀하시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시고 친구들은 잘못했지만 너는 옳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욥에게 친구들을 위해 번제를 드려라 하셨고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욥은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은 욥을 기뻐 받으셨다.
사탄과 천상의 대화에서 사탄과 하나님이 "까닭 없이"라는 주제로 대화하셨고
욥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했다.
욥과 세 친구와 엘리후는 그 "까닭 없이"라는 주제로 논쟁을 벌였다.
하나님은 그 "까닭 없이"라는 주제에 대한 답을 하셨다.
욥이 끝까지 자신의 "까닭 없는 고난"에 대해서 변론하고 기도하지 않고 포기했다면
친구들고 욥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욥이 끝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있었기 때문이 가능했다.
욥의 "까닭 없이 고난"은 친구들이 하나님을 인과응보로서의 하나님만 알았는데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된 계기가 되었고
또 욥은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중보자로 세움 심을 깨닫게 하셨다.
고난 없는 성숙은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을 때가 있다.
그 고난을 죄로 인한 고난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고난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즉 자신이 깨어지는 경험을 통해 성숙에 이르게 하는 고난도 있고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고난도 있다. 중요한 것은" 까닭 없는 고난"은 없다는 것이다.
죄때문에라는 이런 위험한 발상은 까닭 없는 고난을 통해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할 뿐이다.
욥과 하나님은 이겼고 사탄은 졌다. 승패는 이렇게 되었다.
그리고 욥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셨다. 병도 낫게 하셨고 재산도 축복하셨다. 그리고 140세까지 장수하게 하셨다.
말년에는 자녀도 주셨다. 아내가 함께 했다는 말은 찾을 수가 없지만 원래 부인인지 새로운 부인인지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다.
그러나 말년에는 표현에 다른 부인일 수 있다는 상상도 해본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욥기를 통해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난 가운데 있는 지체를 위로하라는 말씀이고 고난은 죄로 인한 고난도 있지만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성숙하게 만드시고 중보자로 세우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욥이 잃어버렸던 제산과 자녀의 복을 두 배로 받았다고는 하지만 과연 욥은 행복했을까라는 질문을 해볼 필요는 있다.
재산과 병은 되돌려 받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자녀를 잃은 욥과 아내의 상처는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는 상처이다. 여전히 욥과 아내는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았을 것이다.
욥은 고난 가운데 있는 지체에게 훌륭한 위로자 중보자가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욥도 여전히 누군가가 위로자가 되어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중보자가 되어주어야 함을 우린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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