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말씀 묵상

욥기 32장에서 37장 묵상

차작가 2023. 9. 25. 12:40

31장까지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이 끝이 나고 욥도 세 친구도 말을 그친다.

32장에서 드디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후이다.

엘리후 이름의 뜻은 "그는 나의 하나님 "이라는 뜻이다.

욥과 세 친구는 다른 민족 사람이지만 유일하게 엘리후는 히브리 사람이다.

엘리후는 문맥상 대화로 봐서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네 사람의 논쟁을 경청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첫 마디가 화를 내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욥이 "하나님 보다 자기가 의롭다"해서이다.

그런데 이 말은 틀린 말이다.

자신의 죄가 없음을 이야기했지 하나님 보다 의롭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이 사람의 시작 자체가 살짝 왜곡되고 과장되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사실화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세 친구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그들이 대답도 못하면서 욥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논쟁에 끼어들지 않은 이유는 네 사람에 비해 자신이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엘리후는 뒷전에 서서 그들의 논쟁을 다 들으며 이 논쟁의 결과가 어떻게 정리되는지 지켜본 것으로 보인다.

그가 그들과 어떤 친분이 있는지 전혀 소개되어 있지도 않고 어떤 이유로 그곳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 그는 욥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자신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준다며 자신의 깨달음은 하나님께로 온 것을 명시하며

마치 자신의 의견은 하나님께로 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세 사람이 욥을 꺾지 못하고 그들이 욥이 의롭지 못함을 파악했으나 욥을 추궁할 자는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욥을 꺾어라는 말이 무척 거슬렀다.

아픈 자를 위로해 주기 위해 온 것이지 그를 정죄하러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인은 벌을 받는다는 가정을 하고 이 논리가 합당하기 위해서는 욥은 죄인이어야만 한다고 결론을 만들어 가고 있다.

엘리후는 얼마나 잘난 척을 하고 싶은지 자기 속에 말이 가득하여 내 영이 나를 압박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종의 할 말이 많지만 많이 참았다는 뜻이다.

이런 엘리후에게 욥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부탁한다.

엘리후는"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그대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33:4-5)라고 욥에게 말한다.

마치 죄인이 심문 받듯이 법정에서 말하듯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33:9-11) 이 말과 같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함을 들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세 친구와 다르게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 혹은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33:17-19) 말한다.

세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했지만 엘리후는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그 사람의 교만함을 막고 옳지 않은 행실을 버리게 하고

멸망하지 않게 하시는 그런 징계도 있음을 이야기한다.

즉,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한 뜻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돌이키면 하나님은 회복시키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그의 공의도 회복시키심을 말한다.

이것은 바른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고난을 주심은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옳은 말이지만 33절과 같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그대를 가르치리라" 이런 태도는 엘리후가 얼마나 교만한 사람인지를 알게 한다.

이런 엘리후에게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 (34:5-6) 욥의 대답에 엘리후는 욥은 비방을 물 마시듯이 하는 자이고 악한 일을 하는 자와 한패이고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라면서 왜곡한다.

또 엘리후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불의를 싫어하신 것과 사람의 모든 길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욥에게 침묵하시는 것도 정죄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신다면 아무도 그를 뵐 수 없다며 말한다.

그러므로 욥은 끝까지 시험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욥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더 죄에 반역을 더하므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 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35:2-3)

욥이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며 또한 하나님께 무엇을 받겠느냐

그리고 8절 말씀처럼 욥의 악은 욥과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고 욥이 말하는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다고 욥을 비하한다.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36:2)

엘리후는 하나님을 위하여 할 말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이 하나님의 편에 서서 말한다는 것이다.

3절 먼 데서 지식을 얻고 이 먼 곳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식을 얻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말은 거짓이 아니고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현재 너와 함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교만한 말인가!

그런데 5절부터 쭉 이어지는 말씀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게 딜레마이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한다는 이 엘리후의 말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처럼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논쟁의 주제가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찬양하고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이야기하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지구를 운행하시고 자연을 통치하시는 이 과정을 옆에서 본 것처럼 자세히 설명한다.

5절부터 이어지는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고 고난받는 자에게는 공의를 베푸시고 의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하나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귀를 열어 듣게 하시고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고 순종하면 형통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

고난 가운데도 이끌어내셔 옮기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이런 말을 듣는 욥을 상상해 보니까 내가 만약 욥이라면 오히려 힘이 날 것 같았다.

사람이 고난 가운데 있으면 그 고난에 갇혀서 실제적으로 봐야 할 것을 못 보는 경향이 있다.

욥이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까닭 없는 고난"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 말을 들으면 힘이 났을 것 같다.

엘리후 말처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고 잊지 말고 찬송하는 일을 엘리후를 통해 기억하게 하셨고

뿐만 아니라 인간사 외에도 빗방울이 증발하여 안개가 되게 하시고 구름과 우렛소리도 만드시고 번갯불도 만드시는 하나님

이 광대하고 지극히 높으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엘리후가 욥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엘리후는 욥이 탄식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만나기를 기도하는 모습을 자신이 의인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그를 죄인으로만 단정 지었다.

여전히 엘리후도 욥이 처한 고통의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엘리후의 말처럼 사람에게 질병을 보내셔서 잘못을 고쳐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그것을 판단할 수 없다.

오직 판단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잊고 있는 것이다.

엘리후의 등장은 세 친구와는 다르게 욥의 고통은 하나님이 욥을 고쳐주시기 위한 방법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그리고 등장하면서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나는 뜬금없이 등장하는 엘리후가 무척 인상 깊었다.

왜냐하면 욥기 1장에서 등장인물을 소개할 때도 나오지 않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엘리후는 하나님과 함께 이 논쟁의 광경을 주시하다가 중간에 등장해서

네 사람의 논쟁을 요약하고 자신의 의견을 던지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답변을 듣기 위한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이 보였다.

그런데 1장에서 등장하는 인물 중에 빠진 게 있다.

바로 이 논쟁을 부추긴 사탄이다.

욥기의 핵심 단어는 내 생각에는 "까닭 없이"이다.

사탄은 "인간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였고 그 대표적인 인물로 욥을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은 까닭 없이도 자신을 섬긴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욥은 까닭 없이 고난을 받게 된다.

그래서 내 생각은 엘리후가 사탄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논쟁의 자리에는 당연히 하나님은 보이시지는 않지만 함께 하신다.

그리고 이 결론이 어떻게 되느냐를 가장 궁금해야 할 존재는 사탄이다.

그래서 사탄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세 친구도 욥도 까닭 없이 논쟁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결론이 어떻게 나든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자신에게 온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자신이 말하는 지혜는 곧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는 거짓말쟁이인 사탄밖에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원칙 자연의 규칙 이런 것들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씩 왜곡하는 것도 사탄과 닮아있다.

이것은 사탄이 하와를 하나님 말씀으로 유혹하는 것과 아주 흡사하다.

창세기 3장 1절에서 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렇게 선악과만 먹지 말라 했는데 모든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라고 하는 것과 같이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씩 왜곡한다.

세 친구가 욥을 꺾지 못하자 자신이 마지막 한 수를 던지며 욥을 이기려 했고 욥을 이기지 못하자

엘리후 말 이후에 하나님이 답변하시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하나님이 욥에게 대답하실 때 세 친구에도 욥에게도 말씀하지만 엘리후에 대한 말씀은 없다.

그래서 나는 엘리후가 사탄이다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개인적인 생각은 사탄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정말 재미있었다.

엘리후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잘 모르지만 여러 견해가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나는 단지 욥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까닭 없이"라는 주제를 던진 사탄과 하나님

그리고 결론에서는 사탄이" 까닭 없이"를 어떻게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존재가 등장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설정으로 책을 읽을 때 훨씬 이해가 잘 되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다음에 읽은 때는 또 바뀔 수 있다.

왜냐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알려 주시고 또 여러 신학적인 자료들을 공부하면서 충분히 더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까닭 없이"라는 핵심 단어가 하나님이 어떻게 풀어가실지 정말 기대가 된다.

오늘 말씀 중에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으며 오직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다시 묵상했다.

내가 가장 많이 짓는 죄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죄이다.

이참에 내 마음 밭에 그리고 내 입술에 "판단 금지"라고 쓰고 다닌다는 마음으로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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