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말씀 묵상

욥기 12장에서 21장 묵상

차작가 2023. 9. 25. 12:35

12장에서 21장은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앞 장에서 소발이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이처럼 욥이 죄를 지음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완전히 못 박아 버린다.

욥이 당한 고난은 인과응보임을 못 박는 것이다.

이런 소발에게 욥은 12장에서 14장에 걸쳐 긴 반박을 한다.

소발에게 너만 참 백성이구나! 너만 지혜롭구나! 네가 죽으면 지혜가 죽겠구나! 말한다.

얼마나 어이없으면 욥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답할 수 있을까?

나도 너희 못지않다. 그렇게 간단한 일을 누가 모르겠느냐라고 말한다.

소발이 욥이 당한 고난이 인과응보라고 결론 내리자 그렇지 않음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 시작한다.

12장 6절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세상은 공평할까?

세상에는 사기꾼 거짓말쟁이 자기만 배 채우는 그런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도 잘 먹고 잘 산다.

아부하는 자는 승진도 빠르고 편법을 써서 대학입시에 성공하는 유명한 정치가들의 자녀들도 있고

부모의 빽으로 좋은 직장에 낙하산으로 채용되기도 하고 힘이 있으면 군대도 면제되고 돈 많은 면 좋은 과외 받아서 좋은 대학도 간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공정한 재판도 못 받고 뼈빠지게 노력해도 자신의 자리를 강탈 당하기가 일쑤다.

세상의 논리에는 인과응보가 무용지물일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나 욥은 10절에서는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라고 말하고

16절에서는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즉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고백한다.

소발과 친구들이 아는 것은 욥도 못지않다고 말한다.

이젠 욥은 더 이상 친구들과 논쟁하지 원하지 않는다.

드디어 욥은 하나님과 대면하길 원한다. 조금씩 욥은 강해져 가고 있다.

무죄한 욥을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친구들에게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 즉 돌팔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차라리 잠잠하면 그것이 그들의 지혜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속 시원하게 한방을 날린다.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만일 너희가 몰래 낯을 따를진대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 그의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

그러며 이제는 자신을 내버려 두고 무슨 일이 닥치던지 자신이 당할 거라며 자신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욥은 진심으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자신이 당한 까닭 없는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묻기를 원한다.

하나님께 이 모든 일을 아뢰고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의 구원이 되시는 믿음의 고백을 한다.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13:23-24)

이 구절에서 욥의 처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뿌리가 말라 줄기가 죽을지라도 물에 닿으면 다시 가지가 뻗어 가지만 사람이 죽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함을 이야기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고난을 돌아 보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그런 욥에게 엘리바스는 두 번째로 논쟁한다.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 " (15:5-6)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우스 땅에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그런 욥이 이젠 친구들에게 죄인이고 간사한 사람이고 정죄한 사람이 된 것이다.

욥은 친구들에게 때로는 거친 말로 항변을 하긴 했으나 사람은 모두 죄인이지만 이런 고난을 받을 만한 죄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 욥에게 엘리바스는 첫 번째와 다르게 두 번째 논쟁에서는

"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하나님께 분노하느냐 네 입을 놀라느냐" 하며

친구에게 위로가 아닌 저주를 듣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 솔직하게 탄식하며 기도할 수 있다.

그들이 아는 하나님은 잘못된 부분이 많다.

그들의 신학적 관점으로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연좌 맷돌을 목에 달아 빠뜨리는 것이다.

엘리바스가 하는 말은 맞는 부분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악을 싫어하고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그리고 때로는 죄로 인하여 고난도 온다. 그 모든 칼날 같은 말을 스스럼없이 또한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한다는 것이 문제가 있다.

말씀을 읽으면 엘리바스가 무서울 정도롤 교만한 사람임을 느낄 수 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 25:11) 이런 말씀처럼

그들이 욥에게 한 말은 경우에 합당한 말이 아니다.

친구들은 똑같은 패턴으로 인과응보의 하나님만 강조하고 있지만 욥은 조금씩 변화됨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는 폭이 넓어지고 친구들의 말에도 옳은 부분은 인정하고

상처 입는 마음도 솔직히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엘리바스의 말에 욥은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 이구나"라고 반박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여 과녁을 삼으시고 자신의 목을 잡아 부서뜨리시며 그 화살이 사방에서 날아와 자신의 몸에 박히므로

괴로움을 토로하는 욥을 보며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모습이 놀라웠다.

친구들을 향해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마소서" (17:4) 이렇게 말을 한다.

이런 욥을 향해 빌닷이 두 번째 논쟁을 시작한다.

그들을 향해 4절과 같이 욥이 말하자 18장 3절에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라고 분을 낸다.

그리고 빌닷은 18장 전체에서 욥을 저주한다.

또 6절에서는 "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이렇게 말을 쏟아낸다.

물론 이 저주는 욥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논쟁에서는 빌닷은 욥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빌닷에게 욥은 언제까지 내 마음을 괴롭히므로 나를 짓부수기를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넘게 나를 학대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구나! 비록 나에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나에게만 있느냐! 즉 너는 잘못이 없느냐!

너는 죄가 없느냐 완벽하느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19:6)

욥은 자신이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임을 알고 있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하심을 알고 있다.

혼자 독백하며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고 이제는 낯선 사람이 되어버린 이 상황이 너무나 힘들고

아내도 자기의 숨결을 싫어하고 자식들도 가련하게 여기며 가까운 친구들이 자기를 원수같이 대하고 있음을 말하며

제발 나를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처럼 자신을 박해하지 말라며 간청한다.

그러면서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19:29)라고 말한다.

어설픈 친구들의 신학적 지식으로 욥 자신을 난도질함을 말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런 욥에게 소발은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20:16) 이렇게 심한 말을 한다.

세 친구 중에 소발은 최악이다.

역시 어린놈이 버릇과 싸가지가 없다.

그런 소발에게 욥은 답변을 한다.

자신은 조급한 상태이고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자신을 잡고 있다고 말한다.

인과응보를 주장하는 그들에게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21:7-9) 말하며

세상은 꼭 인과응보의 결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13절에서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즉 하나님이 때가 되면 그들의 심판도 있음을 다시 한번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니 누가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칠 수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마음의 고통을 품고 죽음으로 행복을 맛보지도 못하는데 이 모든 인간사를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헤아려는 속셈도 알고 있다고 친구들에게 말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헛되이 위로하느냐 너희의 말은 다 거짓이라고 끝을 맺는다.

그들의 시작은 위로였다.

그러나 이제는 위로도 사라지고 욥이 아프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본질은 없어지고 논쟁만 남아있게 된 것이다.

사람을 위로한다는 게 무척 조심스럽다는 것은 알지만 오늘 말씀을 읽으며 정말 위로할 때 함부로 말해서도 안된다는 생각이 가슴 깊이 들었다.

위로가 필요한 자에게는 들어 주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며 진정한 위로자 되신 예수님이 있음에 감사하고 사람은 위로자가 될 수 없음을 알게 하셨다.

언제나 참 위로자가 되어주시고 중보자가 되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들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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