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말씀 묵상

욥기 3장에서 11장 묵상

차작가 2023. 9. 25. 12:33

욥기서 3장에서 31장까지는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은 3장에서 11장까지 묵상했다.

2장에서 그동안 욥의 아내가 욥을 저주하고 떠났다고 알려졌지만 그 안에 반전이 있었음을 알게 하셨다.

욥의 아내에 대해서 2장 9절에서 10절 외에는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스쳐 지나가듯 읽어서

욥의 아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욥은 아내와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 덕분에 욥은 마음 깊이 있는 슬픔을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

드디어 3장에서는 욥의 탄원하는 기도가 시작된다.

욥은 자신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면 입을 열자 말자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다.

3장 11절에 보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하며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고난 당하는 자신에게 빛을 주시고 생명을 주셨는지

그리고 죽기를 바라지만 죽음도 허락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자기의 슬픔을 쏟아낸다.

그동안 욥의 하나님은 기도하면 응답하시고 함께하시던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까닭 없는 고통으로 하나님은 욥에게 낯선 분이 되셨다.

평강의 하나님은 시라지고 현재 욥에게는 평온도 없고 휴식도 없고 불안만 있음을 고백한다.

그런 욥에게 엘리바스의 첫 번째 논쟁이 시작된다.

엘리바스는 너는 이때까지 살면서 여러 사람들을 훈계하고 약한 자를 강하게 했다.

그리고 넘어지는 자에게는 붙들어주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했다.

그런데 고난이 너에게 닥치니 너는 힘들어하고 놀라는구나! 너의 경영함이 너의 자랑이 아니었느냐! 너의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여기에 온전한 길이라는 것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간다는 의미이다.

생각해 봐라 죄 없이 망한 자가 어디 있으며 정직한 자가 고난 당함이 어디 있느냐며 자신의 영적 체험을 이야기한다.

자신이 가만히 있을 때 어떤 영이 자신 앞에 섰고

그때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가 들렸다. 4장 17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이 말씀이 들렸다. 옳은 말이지만 자신의 영적 체험을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기도할 때 주신 것이라며 함부로 주위 지체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거라고 단언하는 실수를 범할 때가 많다.

이렬 경우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기도하며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으로부터 온 것인지 영적 권위가 있는 사람에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 말씀이 옳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는 게 우선이었다.

욥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솔직하게 자기의 감정을 털어놓는 그 시간을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한 게 잘못이었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죄인이다. 또 그 죄로 인하여 망한다. 그러나 욥과 같은 까닭 없는 고난도 있다.

죄로 인해 고난 당하기도 하고 죄가 없어도 고난을 받는다. 즉, 의인도 죄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 보다 어찌 의롭겠느냐 그리고 사람이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이 말도 맞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자신에게 해야 될 말이다.

어느 누구도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정죄할 자격은 없다.

그리고 5장에서 계속 이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욥을 찌른다.

심지어는 5장 8절에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이런 교만한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이 말을 읽으며 나의 마음속으로 "그래 네가 한번 욥처럼 아파봐라. 그러면 하나님을 찾고 네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는지 보자.

아마도 네가 욥과 같은 까닭 없는 고난을 당했다면 벌써 하나님을 원망했을 거다"

그런데 나도 이런 말을 자주 했다.

고난 가운데에 있는 지체에게 "힘들수록 자신을 돌아보고 기도하며 회개하는 게 옳지 않아?" 비록 마음속이지만 수없이 했던 말이다.

그리고 5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 징계 받는 것이 복이 있다라고도 말을 한다.

그러며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고도 한다.

아픈 친구 앞에 해야 될 말이 아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욥의 마음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며 유명한 구절이 18절에 나온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이 손으로 고치시나니" 그렇다. 하나님은 이러 분이시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이라도 상황에 합당한 말이 아니다.

이런 엘리바스의 말에 욥은 답변을 한다.

자신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바다에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경솔하였다고 말한다. 경솔했다는 말은 잘못된 번역이다.

자신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하나님께 이야기할 때 다소 거칠게 표현한 것을 이야기하며 이해해 달라고 하는 말이다.

그럴지라도 자신이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했음이라고 6장 10절에 고백한다.

고통이 심해서 거칠게 말했지만 여전히 하나님 안에 기뻐하며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6장 14절에 고난 가운데 있는 자신이 혹시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자신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친구에게 간청한다.

자신을 가르치고 허물을 깨닫게 하려는 것을 멈추고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고난 가운데 있는 자신이 고통스러우므로 책망을 멈추어 달라고 말한다.

욥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셨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고통 가운데 뒤척이며 이 밤이 언제 갈까! 영혼이 아프고 마음이 괴로워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가운데에서 자신이 바다 괴물이냐며 주께서 어찌 나를 지키시나이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신뢰함을 볼 수 있다.

7장 17절-18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 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나는 이 고백이 너무 은혜로웠다.

과연 내가 이런 고난 가운데 있다면 나는 과연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깊이가 있었다.

그리고 7장 20절에 보면 "내가 범죄 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이 말은 욥이 잘못 안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언약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 놓인 백성이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돌이키신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시고 우리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시길 원하신다.

욥은 큰 고난 가운데 있으므로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난 앞에서는 사람의 사고가 멈추게 된다.

그러나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성숙해질 수 있다.

성숙해지려면 고난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이 의미를 깨닫디 위해서는 자신이 당한 고난을 멀리서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자신의 성찰이 이뤄지고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리고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며 의인이 하나도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있는 욥에게 빌닷이 논쟁을 이어간다.

너무 속상한 것은 욥이 당한 슬픔 중에 가장 큰 슬픔인 자녀를 다루는 것이다.

빌닷의 요지는 욥의 자녀가 죄를 지었으므로 이런 고난을 당했다는 것이다.

자녀들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은 욥을 돌보셔서 평안하게 하실 거라는 말이다.

그러며 그 유명한 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고 말한다.

이 말은 완전히 옳은 말이 아니다. 죄와 관계없이 악인도 잘 먹고 잘 살고 의인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세상의 부가 그 인생의 축복으로 결정지을 수 없다.

이 말을 교회에서 심방 갈 때 함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업체에 액자로 해서 걸어 놓지 않으면 좋겠다.

목회자가 성경을 연구하지 않고 제대로 묵상하지 않고 제대로 문맥을 살피지도 않고

마치 명언처럼 이런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분별없이 사용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이런 빌닷의 말에 욥은 답변한다.

자신도 하나님 앞에 어찌 의로울 수 있느냐! 가령 자신이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한다.

단지 자신을 심판하실 하나님께 간구할 뿐이라고 대답한다.

욥은 자신이 곤비하여 불평을 토로하고 괴로운 마음을 말하며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하나님께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자신이 죄가 없고 이 고난에서 주의 손에서 벗어날 자도 없음을 말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하나님이 10장 12-13절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자신의 고난을 해결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욥의 대답에 소발이 처음으로 논쟁한다.

소발은 욥이 말이 많다고 비난하며 말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며 잠잠하라고 한다.

그는 욥이 죄인임을 죄악 가운데 있음을 단정하며 죄악을 버리고 불의 가운데 있지 말라고 말하며 변론한다.

욥기는 항상 읽으면 속상하고 답답하고 슬프다.

그러나 이번에는 욥의 친구들과 욥의 아내 그리고 욥 모든 캐릭터들이 내 안에 있음을 발견했다.

욥의 문제가 나의 문제이고 욥의 아내 문제도 나의 문제이고 친구들도 나의 문제임을 보았다.

나의 모든 문제를 욥기서를 통해 회개케하심을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