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빌립보서 4장 10~13절

차작가 2024. 4. 17. 10:18

10절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절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화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보충 설명:

10절

본문은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가 어떠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바울 사도가 처음 빌립보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전혀 없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 복음을 가지고 온 첫 사람이었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있게 된 것이다. 빌립보의 신자들은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사랑했다.

10절의 말을 보면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돕기는 했지만 자주 풍족하게 도운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라는 말이나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는 말이 그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사도 바울을 향한 빌립보 교회의 마음은 그가 어려울 때 그의 쓸 것을 기꺼이 도와주는 것으로 드러난다. 바울을 생각하기만 하고 그의 쓸 것을 돕는 일에는 인색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에게 보낸 그들의 선물은 그들의 마음에 의해서 난 싹이요 열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싹이 났다는 것의 의미가 그들이 보낸 선물을 두고 한 것이라면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형제가 어려울 때 그의 쓸 것을 돕기를 망설인다면 결국 내가 의지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들이 보내준 선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으로 기뻐하고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때 보일 수 있는 모습이다. 만약 바울이 조금이라도 자족하기를 배우지 못했다면 어려운 상황에서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해결할 수 있는 물질이나 선물을 기대했을 것이고, 나아가서 자신은 그토록 어려운데 전혀 도와주지 않은 교회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마음에서라면 아무리 도움을 받은들 감사함은 있을 수 없다.

11절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말에서 빌립보 교회에 대한 바울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그것은 혹 빌립보 교회가 선물에 대해 감사하는 자신의 말을 오해함으로써 사도 바울이 마치 선물을 기다렸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동안 바울에게 자주 선물을 보내지 못한 것으로 인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선물로 인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으로 인해서 감사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2절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타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환경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단지 궁핍함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말한다.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을 이해할 때 단지 ‘궁핍할 때 만족하는 삶을 삽시다’라는 결론으로 끝난다면 이것은 앞서 말한 종교계의 수준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자족’의 의미는 모든 것이 부족한 궁핍의 형편에서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풍부한 형편에서도 해당되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삶의 근거와 이유를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자족의 비결이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 바울은 그래서 세 번이나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그냥 두셨다. 바울은 이러한 일을 통해서 자신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배워갈 수 있었던 것이다.

비천에 처하게도 하시고 풍부에 처하게도 하시고 때로는 넘어지게도 하시고 실패하게도 하시면서 삶의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시며 신자의 삶에 중요한 것,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워가게 하신다. 이것을 배워갈 때 우리는 자연히 사도 바울의 자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역시 모든 일에 배부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본문의 말씀은 많은 교회에서 ‘믿음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말로써 강조되고 있는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자는 예수 안에서는 못할 것이 없다. 때문에 하고자 하는 믿음만 있으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강조되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나 그 배경 상황 등등의 모든 것을 무시해 버린 채 단 한 구절의 문단의 문자만으로 해석을 해버리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유명한 말, 즉 명언을 모아놓은 명언집이 아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이 쓴 빌립보서 전체 안에서 본문 한 구절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을 하게 된 그 배경과 그때의 상황까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편지를 쓸 때 사도 바울의 상황은 로마의 옥에 갇혀 있었다.

바울이 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빌립보에 복음이 전파된 것이 사도 바울로 인에서였고 또 그들은 바울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에바 브로디도 편에 사도 바울이 옥에서 쓸 수 있는 선물을 보내었다. 이러한 빌립보 교회의 선물에 감사하는 편지를 쓰게 된 것이고, 선물에 대한 감사의 말이 언급된 것이 4:10-20절까지의 구절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선물 자체에 마음을 둔 것이 아니었다. 즉 선물이 마음에 들어서 감사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바울은 선물의 내용을 본 것이 아니라 선물을 보낸 빌립보 교회의 그 마음을 생각했다.

본문의 말을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에게 능력만 주시면 나는 못할 일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만약 우리도 본문에 대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본문 한 절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이 바울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말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이 말을 대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원하고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의미하는 것이 본문의 ‘모든 일’의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는 그 배경도 함께 앞뒤의 내용까지 함께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4:11-12절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이어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즉 13절에서의 모든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12절에 등장하는 ‘모든 일에’라는 말과 같은 의미에서의 모든 일로 이해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바울이 말하는 모든 일이란 바울이 하고자 하는 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을 비천에 있게 하든 풍부에 있게 하든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한 자로 존재할 수 있었음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든 일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허락하신 비천이든 풍부든 그 모든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서 불평과 실망과 낙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에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고 신앙이 무엇이며 신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에서 사도 바울처럼 ‘배웠다’는 말을 할 수 있어지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능력은 그리스도가 증거 되기 위한 능력이지 우리의 일을 위한 능력은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다.

 

적용:

삶의 근거와 가치는 그리스도에게 있다. 모든 삶의 형편을 통해 자족할 수 있을 때 이것이 능력의 된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란 내가 원하는, 바라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불행 앞에서도 그 일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믿음이 무엇이며 신자로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통해 우린 진정한 능력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목회를 하며 바울만큼은 아니지만 빈과 부에 처하는 걸 경험하게 되었다. 명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극과 극인 차이를 경험하다 보니 바울과 같은 감사가 잘 나오질 않았었다.

그러나 이젠 너무 감사하다. 어려움도 감사하고 지금도 감사하고 건강하지 않아도 감사하다. 그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쁨도 경험하지만 살얼음 같은 불안한 삶도 겪어가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는 맛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능력임을 체험하고 감격한다.

앞으로 얼마를 살아갈지 모르지만 이 경험을 천국 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오늘 말씀을 늘 묵상하며 행하며 그리스도를 알아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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