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59: 인간의 현재와 미래 - 마태복음 13장 47절

차작가 2023. 11. 13. 12:43

47절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절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절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본문 해석:

기독교만큼 인간이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정확한 진리를 말해주는 종교는 없다. 오늘 본문은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어떤 상황이고 앞으로 우리 인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

A. 그물의 의미 (현재)

47절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현재를 가리켜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다’라고 표현했다.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그물에 걸려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쳐 놓으신 그물 안에 들어 있다. 그 어떤 고기도 빠져나갈 수가 없다. 그물 안에 있는 고기를 생각해 보자. 처음엔 갇힌 줄 모르지만 그물이 점점 조여 오고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면 갇힌 줄 알게 된다.

이것이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사회이고 현실이다. 인간이 세상을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물에 들어 있는 고기일 뿐이다.

자신이 의도대로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마음껏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물 안에서 허용된 자유일 뿐이다. 즉 아무리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산다고 해도 (하나님이 쳐 놓으신) 그물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의 영향권을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 날 수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한계가 있다. 1초 앞도 못 내다보는 게 사람이다. 그물은 이미 던져 졌고 물가로 끌려 올려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고기가 물에만 살 줄 알았는데 결국은 그물에 걸려 뭍으로 올라 오게 되어있는 것이 고기의 운명이고 사람의 운명이다.

B. 그물을 물가로 끌어 낼 때 (미래)

1. 그물을 물가로 끄집어내게 되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 작업에 따라 그릇에 담길 자와 버릴 자로 드러난다. (48절 )

그물 안에 있는 고기를 좋은 고기 못된 고기 이 두 종류로만 나눈다. 세상에도 많은 사람이 있지만 신자와 불신자로 나뉜다. 이 세상에 들어와 있는 천국은 그렇게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함께 품고 있는 예수님의 그물과도 같다.

그물에 온갖 고기가 가득하지만 그물을 물가로 끌어내게 되면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못된 고기는 버린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세상 끝에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골라내어 풀무불에 집어넣는 심판으로 말씀하셨다.

2. 예정: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전부 예수님의 심판의 그물에 다 잡혀있는 상태이다. 그 그물 속에서 나쁜 고기가 좋은 고기로 바뀌어 칠 수도 없고, 좋은 고기가 나쁜 고기가 될 수도 없다. 그건 정해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되면 그물 주인에 의해 좋은 고기로 선택을 받은 자들은 살고, 나쁜 고기로 분류가 된 자들은 풀무 불로 던져지게 된다. 예정이고, 선택이고, 편애이다. 심판의 주체가 그물 주인인 하나님이시다.

3. 선택(작정)과 관련하여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옳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옳은 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일을 하나님이 행하신 것으로 규정하고 바라볼 때 우리의 이성과 상식에 어긋나거나 합리적이지 못한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로 인해서 한꺼번에 수십만 명이 죽는 일을 과연 하나님이 행하신 옳은 일이라고 순순히 인정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또한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내게 발생한 고통스러운 일들을 하나님의 옳은 일이라고 순순히 인정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인정은커녕 원망으로 반발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옳은 일로 쉽게 인정할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가 구원을 하나님의 선택과 작정으로 이루신다는 것이다. 행 13장 48절에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말한 것을 듣고 반박하고 비방을 하였는데 이방인들은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고 믿게 된 것을 하나님이 영생을 주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 행위가 아닌 은혜의 선택 (야곱과 에서)

롬 9:11-13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토기장이 비유 롬 9:20-21

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 토기장이는 주권적으로 자신이 만들 그릇의 종류, 즉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선택할 수 있다. 토기장이는 같은 진흙덩이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든다. 이 비유는 만들어질 그릇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결정이 토기장이의 주권적인 권한이라고 말해 준다. 그릇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질지는 진흙이 가진 조건과 별개의 문제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자신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택자와 비택자의 수와 본질, 목적을 주권적으로 결정하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진흙이 가지고 있느 조건과 상관이 없다.

잠언 16:4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선한 의지와 선택을 무시하고 부정한다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합리적이지 못하고 인간을 무시한 교리로 치부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영생, 즉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과 작정으로만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 뜻과 선택도 무시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되면 구원 받지 못한 그 책임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구원이 하나님의 작정하심으로 된다는 말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소요리문답 7문을 보면 ‘하나님의 작정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하나님의 작정은 그의 뜻하신 바에 따라 정하신 영원한 목적인데 이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정해 주셨다’고 답을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받으심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광 받으심을 위해서 일어날 모든 일을 정해 두셨는데, 하나님이 정해 두신 이 일에 창세전에 자기 백성을 예정하시고 예정하신 그들을 부르신 것이다.

이처럼 창세전부터 자기 백성을 예정을 해 놓으셨다는 것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이미 구원 받을 자와 구원 받지 못할 자를 따로 구별하셨다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앞서 말한 대로 구원 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이고, 결국 구원 받지 못한 책임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상선벌악이라는 원칙에 의해 생각하면 누구든 구원 받지 못한 것은 인간의 책임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 애당초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지옥 보내기로 작정한 것이라면 과연 예수를 믿지 않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선택이나 작정이라는 말에 반발을 한다.

더군다나 작정이라는 말을 일어날 모든 일을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한 것이나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한 모든 일이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일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라는 말도 나오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신학자들 가운데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작정 아래 있지만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로 행한 것이기 때문에 죄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작정과 뜻을 벗어나서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그 작정대로 일하시는 다스림 아래 있다는 말에 어긋나게 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잘 이해를 해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작정은 신앙의 절대성과 귄위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신앙의 절대성과 권위성에 대해 이해를 못하면 신앙은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믿지 않는 것으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모든 문제가 인간의 선택과 의지의 따른 것이 될 것이고 이러한 신앙에 절대성과 권위는 있을 수가 없다.

신앙의 길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자만이 갈 수 있다. 이것이 신앙의 절대성이고 권위성이다. 물론 인간은 여전히 악한 본성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신앙의 길보다는 세상을 향한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힘을 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에게 간섭하시고 다스리셔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세상길의 헛됨을 보고 깨닫게 하시고 그 마음을 하나님 나라에 두도록 일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 하나님 나를 소망하고 주를 믿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하나님의 의지고 행하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에 의한 절대성과 권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인간의 의지는 무엇일까? 인간의 의지는 전적으로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의지이기 때문에 오로지 자기를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의지일 뿐이다. 즉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선을 향할 수가 없다.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믿음의 길을 갈 수 없다. 애당초 십자가를 향한 믿음의 길로 가고자 하는 선한 마음 자체가 없는 것이 인간이다. 때문에 ‘예수를 믿고자 하는데도 하나님이 작정하지 않아서 믿지 못하고 지옥 간다면 누구 책임이냐?’라는 말은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무지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을 두고 보신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인간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기준으로 바라볼 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자가 믿었다고 해서 인간에게 영생을 주고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작정의 영원한 목적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작정의 목적을 인간 구원에 두기 때문에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 왜 그냥 두고 보셨는가?’라는 의문이 있게 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작정으로 영생에 있게 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고 증거하기 위해서 필연코 죄가 드러나야 할 수밖에 없고, 죄를 드러내기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시고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것을 두고 보신 것이다. 따라서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한 것 또한 하나님의 허용 아래 된 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허용인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는 전도에 대한 생각도 달라져야 한다. 전도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를 믿게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서 누군가를 믿게 하는 것이 전도라면 하나님의 작정과 충돌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의 전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작정한 그 사람을 믿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전도는 설득과 타협이 아니라 선포이고 증거이다. 내가 누군가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복음의 그릇으로 세워서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생을 주기로 작정하신 자를 찾으시는 작업이 전도이다.

행 13:46절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라고 말한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타협과 설득이라는 방식으로 전도한 것이 아니라 당당한 태도로 복음을 전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신자 됨의 권위이다.

구원은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신자 된 우리는 구원의 문제에서 내세우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동일한 처지로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

누구도 하나님의 작정과 간섭 없이 믿음의 길을 갈 수 없고 영생으로 들어갈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나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나를 부르셔서 믿음의 길로 가도록 은총을 베푸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의 작정이 증거하는 신앙의 절대성과 권위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도로 부름 받고 신앙의 길로 인도 받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무한한 복이다.

 

결론:

심판의 기준이 그리스도

천국 백성은 종교 생활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은혜에 마음을 두는 것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의 선택 행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물에 갇힌 좋은 고기와 못된 고기는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그 실체가 드러난다. 자기 의가 아닌 예수님의 은혜에 마음을 두고 사는 그가 좋은 고기로 드러날 것이고, 반대로 예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의에 마음을 두는 그가 못된 고기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현실은 못된 고기가 좋은 고기로 여김 받기도 한다. 그래서 심판은 필히 있을 수밖에 없다. 좋은 고기와 못된 고기를 구분하는 심판이 있어야 세상이 어떤 착각에 빠져 살았으며, 부지런한 종교 행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고, 부활의 능력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신자로 살아가면 된다.